박한영은 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세월을 살다 간 불교계의 고승이다. 그는 민족사가 수난을 당하던 시기에 항일의식이 투철하여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으며, 불교계 현실을 개혁하고자 하였던 개혁론자였으며 평생을 후학 지도에 헌신한 교육자였다.
박한영의 행적은 크게 세 가지 면으로 요약할 수 있는 데 첫째 불교계 개혁을 통한 유신운동, 둘째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 셋째 한성임시정부 참여와 대동단 활동을 통한 항일운동 등이다. 그의 개혁운동은 한국 불교계의 주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이었는데 이러한 노력은 임제종 설립운동과 사찰령철폐운동, 대중교화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러한 노력은 식민지 치하에서 항일운동과 맞닿아 있었다. 박한영의 불교계 유신운동은 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반봉건·반외세를 지향하면서 일제의 종교 침략으로부터 한국 불교계의 주체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었다. 박한영의 독립운동은 한성임시정부, 대동단 활동, 「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활동들은 모두 주체적이고 독자적인 근대 민족국가건설을 지향한 힘든 노력이었다.
박한영의 지도와 영향을 받은 후학들은 그의 독립운동 행적을 기리고자 2010년 국가보훈처에 독립유공자로 선정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국가보훈처에서는 박한영의 항일운동 행적을 심사한 결과 보류 판정을 내렸다. 그 까닭은 중일전쟁 이후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이 전개될 무렵 박한영이 중앙앙불교전문학교 교장으로서 근로보국대장을 지냈다는 것이 결격 사유가 되었다고 한다. 국가보훈처의 이러한 결정은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한 단편적인 시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는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었던 초기부터 해방이 되는 그 순간까지 수많은 항일운동가를 키워냈으며 그 자신이 직접 그 선봉에 섰기 때문이다.
본고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명하고 박한영 행적의 불교계 개혁운동과 교육사업 그리고 독립운동을 밝히고 그 의의를 찾아봄으로써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나아가서 이 논문이 박한영 연구를 활성화시키는 한 계기가 되어 근현대 불교계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