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초반 유정기가 올린 이이(離異) 청원의 처리와 판결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조선시대 이혼 소송의 성격과 조선 후기 이혼 판결의 특징을 조명했다.
조선시대 혼인 관계 해소는 주로 남편이 처를 버리는 형태로 이루어졌지만 양반층 남성이 처를 버리는 행위는 부부의 의(義)를 훼손한 행위로 보아 처벌하고 재결합하도록 했다. 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부부의 의를 훼손한 자라는 불명예와 함께 관직 진출에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관으로부터 정식으로 혼인 관계 해소를 인정받아 이러한 불명예와 불이익을 받지 않고자 하는 사람들이 관에 이이 허락을 청원하는 경우에 주로 이혼 소송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이 청원을 하더라도 관에서 이를 허락해주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기에 남편 측에서는 이이를 허락해줄 만한 처의 허물을 들어 과장하여 호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 때문에 관에서 이이 청원 소지를 퇴장(退狀)하지 않고 접수한 경우 민사 소송이 아닌 이혼 사유로 제기된 ‘악행’을 처가 실제로 행했는지 조사하는 형사 사건 조사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방침은 조선시대 내내 지속되었다. 그런데 조선 전기에는 처를 버려 부부의 의를 지키지 않은 남편을 규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면 조선 후기에는 처로서의 도리를 지키도록 하는데 이전보다 더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이이 청원에 따른 조사 과정에서 처에게 남편의 죄를 증언하게 할 수 없다는 조선 후기 형사 사건 조사에 통용되던 원칙을 적용하여 남편을 조사하지 않음으로써 이 시기 이혼 소송은 양측에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절차가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