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는 1920년대 중반 한국에 소개된 이후 줄곧 입체파의 창시자이자 거장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서양근대미술을 이해하는 한국의 관점 변화에 따라 입체파의 창시자이자 거장인 피카소는 달리 해석되었다. 즉 서양근대미술이 자연재현에서 벗어나 대상의 형태를 변형하게 된 원인이 주관의 표현에 있다고 이해할 때 피카소는 후기인상파 이후의 주관주의 신흥미술 작가 중 한명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서양근대미술이 성립된 원인을 이지의 작용에서 찾으면서 피카소는 입체파 이후의 주지주의 전위미술의 선구자로 인식되었으며, 나아가 전위미술의 특징을 추상으로 파악하게 됨으로써 추상미술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한 피카소는 한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대립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피카소의 정치적 이념이 부각되면서, 남한에서 그는 공산주의자로 비난받음과 동시에 자유민주주의의 표상인 추상의 선구자로 예찬되었다. 이는 남한 미술계가 공산주의 리얼리즘에 대립하는 자유민주주의 미술형식이자 현대적 미술양식의 상징인 추상으로 나아가야 했고, 피카소는 일제강점기부터 추상미술의 원류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추상화의 선구자이면서 대상의 재현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피카소의 작품형식은 추상을 추구하면서도 독립민족국가로서 민족적 정체성을 표출하기 위해 한국적 소재의 형상을 유지해야했던 남한 미술계 실정에 가장 부합했다. 따라서 남한의 미술계에서는 피카소를 수용하기 위해 그의 정치색을 애써 배제하였고, 이에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자유로운 미술형식을 구가했던 예술가라는 인식만 남아 현재까지 남한에 존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피카소를 지향함에 있어 주관주의자 혹은 주지주의자라는 상반된 기존의 피카소 인식을 해결해야 했다. 이에 남한의 미술가들은 피카소의 입체파에 대해 앞 시대 상반된 인식을 포괄하는 해석을 했고, 따라서 입체파의 정신을 계승한 추상미술 역시 주지적이며 주관적인 표현이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 남한 미술가들의 추상화 과정은 입체파의 주지주의적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이 과정을 통해 도달하고자 한 것은 주관의 표출이었다. 이처럼 한국에서 피카소가 입체파의 거장으로서 주관주의 작가로, 또 주지주의 작가로 인식되고, 그 위에 추상미술의 선구자라는 인식이 겹쳐지면서, 남한의 추상은 이성을 통해 감성을 표출하는 양가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