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김억의 「지새는밤」에서 ‘당대성’과 ‘동시대성’, ‘공동체적 운명에 관한사유’ 등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한국의 근대 서사시로 규정하고 내용 및 주제론적 차원에서 작품을 면밀히 검토함으로써 그 구체적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김억의 「지새는밤」은1930년 12월 9일부터 29일까지 『동아일보』에 ‘長篇抒情敍事詩’라는 부제 아래 연재된 작품으로 두 남녀 주인공 명순(明順)과 영애(永愛)의 사랑과 이별, 이후 유랑과 고난들, 그리고 마지막 재회까지를 기본 플롯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지새는밤」에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두 집안이 ‘몰락’하는 과정과 ‘유랑’ 그 자체다. 사포촌의 몰락은 토지조사사업으로 가속화된 농촌의 몰락과 조선 전역의 상황을 알레고리화하며 ‘고향 상실의식’으로 이어진다. ‘고향 상실의식’은 ‘부재와 상실’을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적극적 의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명순네 가족은 사포촌을 떠나 만주로 이주했으나 가난과 부모의 죽음 등으로 ‘낙토’(樂土) 만주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영애는 남동생의 실종, 아버지의 죽음 등을 겪으며 홀어머니와 함께 평양으로 이주하지만 결혼에 실패하고 기생으로 전락하는 등 남성적 존재가 사라진 세계에서 여성으로서의 열악한 삶을 보여 준다. 명순은 1920-30년대 몰락한 농촌과 조선 농민의 삶을 함축하고 있는 존재이며 영애는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해 이중적 타자로서의 위치에 있는 여성의 삶을 함축하고 있는 존재다. 즉 명순과 영애는 공동체적 주체로서의 개인이며 이들의 삶의 여정은 당대 조선의 민족적 운명에 관한 사유를 내장하고 있다. 특히 만주 체험은 공동체적 운명에 관한 사유를 견인하는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근대시에서 서사시적 상상력의 핵심 요소로 조명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