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는 이병도의 고려시대의 연구를 크게 배경과 방법론,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검토했다. 이는 완결・고정된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형성 중이고 움직인 지식으로 이병도의 연구를 바라보기 위한 것이다.
이병도는 비껴가기 전략과 자신감으로 고려시대의 풍수 도참이라는 주제를 선택했다. 전자는 다른 일본인 학자의 영역을 건드리지 않는 것을 의미하며, 후자는 전통적인 풍수 지식에 대한 자신감을 의미한다.
그는 풍수나 도참은 황당한 미신이라는 점에서 시대와 무관하게 변함이 없었다고 전제했다. 이러한 부정적 시각은 고려시대의 풍수나 도참의 유행을 권력층의 혹신이나 사회불안으로만 설명하게 했는데, 결과적으로 식민사관의 관점을 강화시켰다.
이병도는 관련 사료의 영성함을 중국 풍수서와 현장 답사로 보완하였다. 그가 참조한 중국 풍수서는 고려 시대의 지리지식으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으며, 현장 답사는 일견 근대적 학문 방법론을 차용한 듯하였으나, 결국 자신의 풍수적 안목이라는 직관에 의거함으로써 지관의 풍수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풍수지리’라는 용어는 그가 처음 고안하여 우리나라에서만 사용한다. 그는 1926년 일본어로 발표한 연구의 시작부터 ‘음양지리’라는 용어를 만들었다가, 1930년대 신문 연재를 하면서 대중에게 생소한 ‘음양’ 대신 익숙한 ‘풍수’를 붙여 ‘풍수지리’로 바꿨다. 이는 땅과 인간과의 관계를 다룬다는 점에서 ‘지리’라는 말을 붙일 수 있으며 그 관계가 비록 신비적이기는 해도 음양론 같은 논리에 기반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것이다. 1948년 단행본에도 이 용어가 그대로 사용되며 늦어도 1950년대 무렵에는 대중화된 것으로 보인다. 1980년 개정판의 총론에서는 ‘풍수지리’를 지리관상학 혹은 지리철학으로까지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한학적 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 치밀하고 넓은 사료 섭렵과 열정적인 현장 조사와 같은 이병도 학술의 장점은 이 책에서도 남김없이 발휘되었다. 그러나 당대 학술장에 대한 조망 없이 편의상 주제를 선택함으로써 식민주의적 관점의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논증의 마지막은 자신의 풍수 직관에 의거하였음에도 이를 근대적 학문 방법론으로 오인한 결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풍수지리’라는 새로운 조어를 통해 이 주제를 척결해야 하는 미신 이상의 무언가로 제시했으며, 이는 현재까지 풍수를 대하는 우리의 학문적, 사회적 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