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 윤이병은 1887년 應製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16년 동안 관료생활을 했던 관료로 동시에 金光濟 등과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관료 출신 독립운동가이다. 1887년에 무과에 합격하면서 관료가 되어 1903년 중추원 의관에 이르기까지 16년간 관료생활을 했다. 일제하 대한제국의 관료들은 상당수가 식민 관료로 재임용 되었는데 그는 오히려 이에 저항 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고종세력'으로 전직 관료출신 독립운 동가들과 함께 활동했는데 허위와 김광제 등이 대표적이다. 을미사변이 일어났을 때, 그는 관련자들을 처벌해달라고 호소하며 청복수토역소를 올렸다. '춘생문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임최수, 이도철 등 과 함께 을미사변을 주도한 자들을 제거하고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또한 경제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공제소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 다. 공제소에서는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침탈하려고 하자 제일은행권의 유통을 저지하기 위해 싸웠고, 국채보상운동에서는 금액조사원 역할을 했다. 윤이병은 애국계몽단체이자 보부상단체였던 동아개진교육회에 가 입하여 일제의 침략정책과 이에 동조하던 일진회에 대항하여 정치적, 경 제적, 정신적인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려 하자 당시 동우회장이었던 윤이병은 동우회원들과 함께 친일파인 일진회 를 성토하고 고종퇴위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이로 인해 종신형을 선고받 았으나 3년 후에 사면되었다. 이후에는 임병찬 등이 조직한 복벽주의 의 병단체였던 대한독립의군부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했으나 지도 부가 체포되면서 대한독립의군부는 해체되었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하는 동시에 독립이 된 후를 대비하기 위해 홍진, 이규갑 등에게 한 성정부 수립을 건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윤이병은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위원회의 일원으로 한성정부 수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기여했 다. 본 연구는 공제소와 동우회 등을 이끌었던 지도자급 인사 중 한 명으로 그의 성격과 특징을 규명하는 작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조선 관료가 독립운동가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