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한국 JOC가 가톨릭노동운동을 주도하던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 JOC의 국제적인 관계망을 중심적으로 살펴보았다.
한국 JOC는 1958년 서양사학자 이해남과 서울대학 병원 간호원 박명자의 주도로 창립의 기초를 마련하여 동년 11월 17일 한국 JOC가 창립되었다. 이 날 국제 JOC 창립자이자 지도신부 까르딘과 부회장 마리아 밀스맨 등이 참석하였다. 까르딘은 이 날 공산주의 세력을 막기 위해서는 ‘국제형제, 국제적인 단결’을 주장하였다. 『경향잡지』 1959년 1월호에는 JOC의 조직방법과 JOC의 3대 원칙을 소개하였다. 3대 원칙은 관찰-판단 -행동 등이었다.
1960년대 제1차 아시아평의회와 제2차 국제평의회에 한국대표들이 참석함으로써 국제적 관계망이 구축되었다. 한국 JOC가 국제 JOC의 회원국이 되자 국제 JOC는 국제적인 연대를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하기 시 작했던 것 같다. 국제 JOC는 회원국 JOC를 관리하기 위해 관련 인사들을 여러 차례 회원국에 파견하였다. 1960년대에 내한한 관련 인사들은 아시아 지도신부, 부회장, 서기 등이었다. 그들은 내한 후 한국 JOC의 실태를 살펴보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1960년대 한국 JOC는 국 제 JOC의 국제 반공전선에 편입되어 활동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제 JOC와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그것은 국제 JOC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다시 회복한 것은 1975년 도요한 신부의 국제 JOC 방문과 린츠 제5차 국제평의회의 참가 이후였다. 이후 국제 JOC는 그동안 주도하던 프랑스 대신 제3세계와 개발도상국에서 주도하기 시작하기 했던 것 같다. 이후 국제 JOC는 통일된 국제조직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한국 JOC는 국제 JOC로부터 인적,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대신에 교황청, 서독 미제레오, 오스트리아가톨릭부인회 등이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이들의 지원은 예산 총액 중거의 최대 80퍼센트를 차지하였다. 1970년대 한국 JOC의 국제 원조는 교황청, 서독, 오스트리아의 제3세계와 개발도상국에 대한 외교정책의 일환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원조에 의해 한국가톨릭노동운동은 반공주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