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서 우리는 김남주 시적 주체성의 원형을 추적한다. 김남주 시는 투쟁적이다. 그러나 김남주 시는 동시에 그 투쟁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한계의식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이는 칸트 식으로 표현하자면, 유한한 인간에게서 근절할 수 없도록 내재해 있는 이율배반의 문제와 다르지 않다. 더 나아가, 김남주 시에서는 자신의 유한한 한계로 말미암아 악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인간, 그러나 이러한 악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악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 반복적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김남주의 시와 칸트적 인간이 공통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특징이다.
그러나 김남주 시는 완전히 칸트적으로 환원되지 않는, 비-칸트적인 지점들을 함께 가지고 있다. 칸트가 악의 문제와 관련하여 결코 주목하지 않는 비참함과 처절함의 정서가 바로 그것이다. 이는 김남주 시가 독특하게 지니고 있는 유한성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다. 또한, 악의 극복가능성과 관련해서도, 김남주의 시는 종교에 의존하여 희망을 정립하는 칸트와는 매우 다르다. 김남주 시의 주체는 초월자나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김남주 시의 주체는 자신의 한계상황에 원숙해짐으로써 스스로 희망을 정립하는 주체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김남주 시에서 매우 칸트적이면서도, 동시에 칸트와는 구별되는 주체성이 독특하게 정립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