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초년, 특히 3차 전쟁기는 對거란 외교 정책의 수련 과정이었다. 본고는 당시의 특징적인 對거란정책이 입안되었던 맥락을 이해해 보고자 하였다.
친조 거부와 거란 사신 억류는 993년 통교 이후 고려의 對거란 정책의 측면에서 볼 때 상당히 이례적인 강경책이다. 본고에서는 이 사건들 간의 숨겨진 연관성을 추론하여, 고려 현종대 대거란 강경책이 거란과의 교섭 속에서 진행된 치열한 고민의 결과이자 상대국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역이용해보려는 노력의 성과였다는 점을 논하였다.
먼저 친조 거부와 관련하여서는 친조 제안의 배경을 추정해 보며 제안 당시의 상황이 약 1년 반의 기간 동안 고려의 당초 예상과 달리 크게 변화하였음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고려로 하여금 친조 거부를 결정하도록 한 것은 다름 아닌 거란이었던 것으로 설명해 보았다.
다음으로 고려의 거란 사신 억류 정책과 관련하여서는 여러 기록 속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거란 사신의 인명을 정리하고, 이것이 동일인에 대한 이표기라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아울러 고려가 타국의 사신을, 그것도 자신들을 세 번째로 공격해 온 거란의 사신을 억류하는 무모해 보이는 정책을 입안하게 된 연원 역시 거란의 고려 사신 억류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설명해 보았다. 이로 인해 전쟁이 급속히 종료되거나 거란에 큰 압박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에게 적지 않은 압박을 주었던 적국의 정책을 역으로 채택하였다는 점에서 그 입안 배경 자체는 매우 참신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3차 전쟁기는 거란에 대해 다양한 전략을 실험하며 가장 적절한 대응을 모색하던 시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