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조선시대 왕비·대비의 한글 문서 작성과 그 성격 및 변화를 왕비·대비의 지위 및 권한과 연계하여 검토하였다. 그 결과 왕비·대비가 작성한 한글 문서는 넓은 범주의 諺文敎書라 할 수 있으며, ‘한글로 교를 써서 내린 것’으로 정의하였다. 이때의 ‘敎’는 왕비·대비의 견해를 한글로 작성하여 내린 것이었다. 그리고 ‘한글로 교를 써서 내린 것’에는 諺書와 諺敎가 모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여성에게 공적 활동이 보장되지 않았던 조선에서 왕비·대비의 공식적인 정치활동은 垂簾聽政을 통해 가능하였지만, 왕비·대비가 써서 내린 언문교서는 수렴청정을 하지 않더라도, 조정에 하달되는 만큼 공적인 문서였다. 왕비·대비들의 언문교서는 왕조의 존속 및 왕위 계승 문제, 내명부 관련 사안, 그리고 정국의 향배와 관련한 정치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공적인 기능을 바탕으로 정치성을 가지고 있던 왕비·대비의 언문교서지만, 그 자체가 결정된 사안을 하교하는 것이 아니라, 결정을 위한 왕비·대비의 의사를 글로 써서 밝힌 것이었다. 이는 공식적 정치활동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한된 범위 내에서 정치성을 가진 것이었다.
대비의 공식적인 정치참여가 용인된 수렴청정은 대왕대비의 지위를 국왕과 같이 제도적으로 규정하였다. 수렴청정기에도 대왕대비는 언문교서를 하달하였고, 이는 왕명과 같이 승지를 통해 출납되었다. 대비와 승지 사이에 서면으로 하교가 전달되고, 보고는 언문으로 번역한 문서가 올려졌다. 이때 왕래한 언문교서는 수렴청정기 일상적인 정치활동이었다. 그렇지만 대왕대비의 언문교서는 신하들의 의견을 이끌어내는 기능을 넘어서, 대왕대비의 정치적 결정을 확정 짓고 이를 공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수렴청정기의 언문교서는 왕명출납으로서 이루어지는 일상적인 정치활동에 더하여 중요한 정치적 사안과 입장 혹은 政令을 한글로 작성하여 공표하는 頒敎의 기능이 더해진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한글로 교를 써서 내린 것’으로서 언문교서, 그리고 정령으로서 수렴청정기 대왕대비의 언문교서, 이들은 모두 왕실 여성이 한글로 문서를 작성하여 정치활동을 하였던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