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의 목적은 박완서 소설을 통해서 한국 사회의 ‘아파트 디스토피아’ 담론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이다. 여기서 ‘아파트 디스토피아’란 한국 사회의 부정적 아파트 담론을 의미한다. 아파트에 대한 비판적 재현들은 아파트 공화국의 위력을 약화시키기보다는 강화․재생산하는 측면이 있었다. 아파트의 막강한 위력에 대한 재현이 오히려 대안적․대항적 삶의 상상력을 위축시켰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완서는 단순히 아파트에 의해 억압․소외당하는 인물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부정적 속성을 전유하거나 창의적으로 재활용하는 인물들을 다뤘다. 박완서의 『서있는 여자』에서 아파트의 비장소 및 장소상실의 특성은, 성차별적인 공동체에서 벗어나려는 여성에게 유리한 환경적 조건이 되었다. 한편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서 아파트는 인간적 유대의 장소이기 보다는 상품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부동산이었다. 그러나 아파트는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는 인물에게 필수적인 자원으로 기능했다. 여기서 박완서 소설의 인물들은 주어진 환경에 수동적으로 순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주하기’를 통해 공간의 의미와 기능을 변화시키는 주체라고 볼 수 있다.
정리하자면 박완서는 아파트를 단순히 비인간적이거나 억압적인 공간이 아니라, 지배문화와의 협상이 이루어지는 현장으로 그렸다. 그럼으로써 단순히 아파트 디스토피아를 재생산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서사의 가능성을 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