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범죄 가운데 절도죄, 횡령죄 및 장물죄는 재물만 행위객체로 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재산범죄가 성립하려면 불법영득의사가 있어야 한다. 불법영득의사는 점유의 배제가 영구적이어야 인정된다. 예를 들어 타인의 예금통장을 몰래 가지고 은행 창구로 가서 현금을 인출한 뒤에 통장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두었다면, 통장 자체에 대한 불법영득의사가 인정되지 않는다.
판례는 타인의 예금통장을 몰래 가지고 은행 창구로 가서 현금을 인출한 뒤에 통장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두는 행위가 절도에 해당한다고 본다. 예금통장의 예금액 증명기능이 침탈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금통장의 예금액 증명기능이 재물에 해당한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예금통장의 예금액 증명기능은 유체물도 아니고 관리할 수 있는 동력도 아니므로 재물이라고 할 수 없다.
예금통장의 예금액 증명기능을 재물로 보는 판례는 문제가 있다. 예금채권은 재물이 아니라 재산상의 이익이라고 명백하게 밝히고 있는 판례와 서로 모순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타인의 직불카드를 몰래 꺼내 가서 그 카드를 이용하여 계좌이체를 통해서 자신의 계좌에 금전을 이체하고 카드를 본인에게 돌려준 경우 카드 자체에 대해서는 절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하는 판례와도 충돌한다.
이러한 판단상의 모순은 해석론 차원에서 해결하기 불가능하다. 불법영득의사와 관련해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입법을 통해서 해결한 전례가 절도죄 영역 내에 이미 존재한다. 타인의 자동차를 동의도 없이 잠시 운행하였다가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둔 경우 불법영득의사가 없어서 절도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문제이었다. 이문제는 형법 제331조의2에 자동차 등 불법사용죄 처벌규정을 신설함으로써 해결 되었다.
타인의 예금통장을 몰래 가지고 은행 창구로 가서 현금을 인출한 뒤에 통장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두는 행위에 대한 처벌규정을 새로 만듦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형법 제331조의3에 예금채권 부정사용죄 처벌규정을 다음과 같은 문구로 신설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라고 본다. ‘타인의
예금채권을 권한 없이 행사하여 그 예금채권의 총액을 감소시킨 자는 6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법정형을 절도죄의 경우와 일치시킨 이유는 절도죄와 불법의 정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