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는 17세기 초반에 ‘해과’라는 특별 무과를 설행하였다. 바다를 지키는 수군, 즉 주사를 대상으로 과거를 설치하고 시행한 데서 해과라고 부른 것이다. 일명 ‘주사과’ 또는 ‘주사시’라고 하였다. 수군의 진영인 해진에서 비정기적인 별시를 치렀다고 해서 ‘해진별거’ 또는 ‘주사별시’라고도 하였다.
원래 해과는 1594년(선조 27) 4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건의에 따라 처음 시행되었다. 이때 통제영이 있던 한산도에서 별시 무과를 실시하여 주사급제 100명을 선발하였다. 이어서 1596년(선조 29) 윤8월 통제사의 요청으로 한산도에서 또 한 차례의 무과를 실시하였다. 두 차례의 과거 모두 전쟁 중 바다에서 왜적을 막느라 고생한 수군을 위로하고 사기를 앙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과가 다시 등장한 것은 전쟁이 끝난 지 5년이 지나서였다. 1603년(선조 36)에 영ㆍ호남의 수군진 4곳(부산, 거제, 경도, 고금도)에서 세 번째의 주사별시 무과를 설행한 것이다.
수군을 대상으로 실시한 해과는 임진왜란 전후 10년간 과거로 진출하지 못했던 다양한 신분층의 사회이동을 가능케 하였다. 무엇보다도 고역에 해당하는 양남지역의 수군들이 무과로 진출하는 계기로 활용되었다. 다만, 해과방목의 한계로 수군들의 구체적인 실상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해과는 양남의 수군들 뿐 아니라 경중의 양반 자제들이 다수 합격한 사실이 확인된다. 1603년 해과의 설행은 임진왜란 직후 혼란한 인심을 수습하고 수군의 부방군을 확보함으로써, 일본의 재침을 대비하는 동시에 양남의 해상방어체제를 정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