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 법화사는 제주 지역의 주요 불교사원으로 13세기 중엽 혜일의 법화사시문이 첫 기록이다. 혜일의 제주 유력 시기는 1248-1249년으로 추정되며, 묘련사, 보문사, 서천암, 굴암 등 5개 사원을 유력하고 기록을 남겼다. 법화사는 1269년 에 탐라 성주층과 지방관의 지원을 받아 중창을 시작했다. 중창은 삼별초의 입도, 일본 정벌, 대기근 등으로 장기화되었으며, 법화사를 중심으로 탐라 성주층, 유총관 고적 등의 지원을 통해 1279년에 중창을 완료했다. 법화사와 성주층은 충렬왕의 지원과 전통적 사원 중수 이념을 공유하며 중창을 추진한 것으로 추정된다.
법화사의 미타삼존불은 14세기 전반에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며 충선왕 대 탐라군민만호부 달로화적으로 임명된 박경량의 활동 시기인 1308-1320년과 기황후의 불사가 전개되는 1330-1350년으로 추정된다. 법화사는 미타삼존불상을 봉안하여 사격을 제고하고, 원 황실과 고려 국왕을 축수하는 기원사원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후기 법화사의 위상은 제주 및 고려 사원과의 관계망, 개경의 묘련사와원도의 연성사와의 관련성 등을 통해 살펴보았으며, 제주 법화사는 대몽항쟁기에는 강진 백련사와 남송 명주 연경사와 연결되는 네트워크를 형성했고, 원 간섭기에는 강진 백련사에서 개경 묘련사와 연결되고 원도의 연성사로 이어졌다.
법화사는 발굴 유구에 의거해 중소 규모로 추정된다. 고려 후기에는 미타삼존불을 봉안하여 정토신앙을 갖추는 한편 천태정토신앙의 양측적 방편성을 통해 전쟁의 혼란과 사회 현실에 대응했다. 또한 나한신앙을 통해 국가와 사회적 관심사에 대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법화사는 국가의 비보사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원관사원, 축리 및 기원사원으로시대별 다양한 역할을 했다. 법화사는 고려 전기에 비보압승 정책에 따라 비보사원으로 지정되었으며, 제주 지역의 동서 및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 요지의 원관사원으로도 기능했으며, 황제 및 국왕을 축수하는 축리 및 기원사원으로 기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