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제주도로부터 중국⋅대만⋅일본⋅유구 등지의 이국(異國)으로 표류해 간 3,681명을 송환하는 과정에서 유독 지식인층, 즉 한문을 사용할 수 있었던이들이 동승한 16건의 사례를 추적한 결과, 동승했던 여타의 표류인과는 차별적으로 표착 국가의 구호 및 송환 과정에서 후한 대우를 받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에 그 대우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로, 표류 지식인층은 이국으로의 표착 후 구조되는 과정에서 여타 표류인들과는 다르게 별도의 숙식 제공 및 전별연(餞別宴) 개최 등의 후한 대접과 함께옷과 물품 등을 지급받았음이 확인된다.
두 번째로 조선으로 송환되는 과정에서도 표류인의 신분이 관인임이 확인되면이국의 현지 관리들은 이들을 별도의 사자(使者)[특송사ㆍ대차왜(特送使ㆍ大差倭)] 들로 하여금 배정시켜 별선(別船)을 태워 호송하는 등 차별적 모습을 보였다. 특히이러한 모습은 일본으로 표류해 간 관인이 부산으로 이송되기 이전인 쓰시마[對 馬]로부터 송환되는 과정에서 유독 확인된다.
세 번째로 보통의 표류 사례와는 다르게 그 송환기간이 매우 단축되어 신속한송환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특히 중국과 유구인 경우 대략 3년이란상당한 기간이 소요되지만, 표류 지식인층의 송환인 경우 이보다 훨씬 빠른 5-6개월 만에 송환되었음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표착국에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다른 동승 표류 제주인들과 달리, 표류 조선 관인에 대해 차별적 대우를 실시했을까? 이와 같은 모습은 중ㆍ근세시기동아시아의 보편 문명으로써 예(禮)와 인(仁)으로 대변되는 유가사상(儒家思想)과관료제에 기반한 계층적 위계질서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중국중심의 중화적(中華的) 세계관 속에서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운용되었던 인도주의적 차원의 표류인 무상 구호 및 송환체제에 적용됨과 동시에 표류인들의 귀천(貴 賤)에 따라 분별하여 차별적으로 대우하는 양상을 낳았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한문(漢文)’이라는 동아시아의 공통 문어(文語)는 표류 후 이국인들과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는 간접 매체로 작동하여 표류인과 현지인들 간의 동질감 및공감대를 형성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표류인들 대부분은 뱃사람이나상인들로 비문자층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표착지에서의 현지인들과 언어 장벽에 부딪혀 소통의 부재를 불러왔다. 이에 상대적으로 표착 국가의 현지인들은 한문 필담(筆談)이 가능했던 표류 조선 지식인들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을 쏟았을지모른다. 이러한 가운데 특히 현지 문사(文士)들과의 시문창화(詩文唱和)를 통한 교류는 개인적 우의를 다지는 소통의 기회가 되었음에 따라 여타 표류인들과 다른특별 대우를 받았던 것이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