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풍운뇌우단은 탐라국 시기 성주⋅왕자가 칠성단을 쌓고 북두칠성에 제사를 지냈던 遺制를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즉 여말선초 탐라지배층은 풍⋅운⋅ 뇌⋅우 가운데 風師와 雨師가 각각 箕와 畢의 별자리에 해당하므로 북두칠성과노인성에 대한 신앙을 전승하여 그들의 재지적 권위를 정당화하고 신성화하기 위해 풍운뇌우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더욱이 18세기 초반 탐라지배층은 석전제의 제물도 國學과 동일한 희생을 쓰고, 사직단 기우제에서 삼을나의 위판을 배위로 진설함으로써 조선시대에도 제후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자 했는데 풍운뇌우단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이형상목사가 “節目에 관한 일은 오직 스스로의 典禮만을 쫓아 지키려 한다.”고 했듯이탐라지배층은 탐라의 舊例로써 국가제사의 儀를 변용하여 그들의 재지적 권위를높이고 있었다. 이형상 목사는 풍운뇌우제가 지방관으로서 감히 행제할 수 없는제사이기 때문에 철폐했지만 그것이 갖는 본질적 의미는 ‘탐라의 舊例로써 국가제사의 儀를 변용’하는 舊習의 철폐에 있었다.
제주 풍운뇌우단은 정동후 목사의 복설 명분과 영의정 김창집의 근거 마련으로복설된다. 풍운뇌우단과 그에 따른 제사의 복설은 主祭者가 탐라지배층이 아닌국왕이 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탐라지배층의 제사권이 소멸하고 그에 따라재지적 권위가 약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本島에는 본래 풍운뇌우단이있어 1천여 년 동안 삼가 香祀를 받들어 왔다.”라는 복설 명분을 정동후 목사 이후, 제주목사들이 祭文에서 지속적으로 언급함으로써 제주 ‘풍운뇌우단’은 탐라의 遺 制로서 관념상 존중되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