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중성은 경기도 파주의 칠중성으로 비정되는 성곽으로 그 위치가 명확하게 비정된다는 점에서 역사적 자료로서 높은평가를 받고 있다. 본고에서는 우선 고고 자료를 바탕으로 칠중성의 축조 주체와 시기를 추론하고자 하였다. 다음으로 문헌 기록에나타난 칠중성을 여러 관점에서 접근해보고 영유권 변천을 통해 당시의 접경 양상을 파악해보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는 칠중성이 가지고 있었던 전략적 위상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3세기 후반∼4세기 전반 경 임진강 유역으로 진출한 백제는 토성혹은 토루나 柵과 같은 형태의 칠중성을 축조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러다가 5세기 후반 고구려가 임진강 유역을 영유하면서 칠중성을차지하였는데, 특별한 개·보수 없이 그대로 연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7세기 전반에 신라가 차지하면서 석축 형태로 개축하였다.
칠중성은 임진강의 여울인 술탄과 호로탄을 통한 도하를 감시·통제하였는데, 이를 통해 평양-서울 교통로를 연결하거나 끊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하였고 또한 임진강 유역이삼국과 신라·당 사이의 접경이 되면서 칠중성은 남·북진 세력 모두진군의 첫 번째 관문으로서 공격 대상이 되었다.
칠중성은 7세기 전반 신라와 고구려가 임진강을 경계로 대치하면서 그 중요성이 크게 대두되었다. 만약 고구려가 칠중성을 차지한다면 한강 유역 방어와 북진의 거점성 역할을 하던 북한산성으로빠르게 진군할 수 있음으로써 한강유역 진출의 주도권을 잡을 수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칠중성은 신라에 있어 고구려의 남진을 방어하는 전략적 요충지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와 같은 기능은 나당전쟁기까지 이어졌다. 한편 칠중성은 신라의 성곽 방어체계가 가동되고 있는 상황에서 간파천로의 아미성과 수철성 그리고 설마천로의 감악산보루와 무건리보루를 거느리는 거점성으로 기능하였다.
나아가 포천 반월산성과 더불어 7세기대 임진강-한탄강 방어선의핵심으로 거듭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