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7세기 신라 승려 양지의 불사 활동과 역할을 선덕왕 대의 시대적 맥락에서 새롭게 살피고자 하였다. 기존 연구에서는 양지의 작품과 활동을 근거로 그를 서역 또는 남방계 외국인으로 보거나 예술가 또는 장인의 역할을 담당한 승려로 이해하였다. 동시에 양지가 선덕왕 시기에 활동했다는 기록에도 불구하고, 석장사에서 발굴된 유물 연대나 사천왕사의 신장상을 근거로 그가 7세기 후반~8세기 전반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양지의 작품에 중점을 둔 선행 연구에서 나아가 이 글은 문헌사적 관점에서 양지의 활동에 접근하였다. 이를 통해 양지가 만든 것으로 전하는 영묘사 장육상이 선덕왕 시기에 제작된 배경과 해당 불사 활동에 참여한 양지의 역할을 밝히고자 하였다.
양지사석조를 검토한 결과 양지의 역할은 예술가보다는 불사에 참여한 승려로서의 면모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측면은 양지의 활동 가운데 영묘사 장육상을 조성할 때의 일화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선덕왕은 내우외환의 상황에서 왕실 사찰인 영묘사에 장육상을 조성하여 민심을 결집하고,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양지는 뛰어난 재주와 수행을 기반으로 공역에 동원된 이들에게 불사 참여가 가지는 불교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성안의 남녀가 자발적으로 불사에 참여하여 장육상을 완성하였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선덕왕이 도모하고자 했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주도한 양지는 성안의 남녀에게 불교를 널리 전파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양지는 왕실과 귀족 중심으로 불교가 신봉되던 신라 사회에서 왕실의 후원을 바탕으로 일반 민에게까지 불교를 알릴 수 있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