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녹색혁명은 주곡인 쌀의 자급생산으로 이룩되었다. 쌀 자급을 가능하게 한 것은 품종의 개량에 의한 쌀 생산 능력향상과 재배기술의 발전, 그리고 이들 품종과 기술을 신속하게 농가에 보급하는 등 농업분야의 연구개발과 기술보급체계가 효율적으로 어우러진 결과이다. 또한 이러한 결과들이 이룩될 수 있었던 데에는 정부의 쌀 자급생산에 대한 확고한 정책 의지와 실천, 수리시설 등 생산기반의 정비, 비료와 농약 등 생산 자재의 원활한 생산 공급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1. 벼 단간 직립 다수성 품종개발
우리나라 벼 품종개발을 위한 근대적인 기술체계는 1906년 대한제국 권업모범장의 설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30년대까지는 재래종의 수집에 의한 순계분리와 도입품종의 국내적응시험에 의해 우량품종을 선발하여 농가에 보급 재배토록 하는 육종의 기초기술들이 주로 이용되었다. 교배에 의한 벼 품종육성은 1915년 처음으로 인공교배를 시작으로 1932년에 최초로 남선13호 등을 육성하면서부터 과학적인 기술체계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 광복과 정부수립, 6.25전쟁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1960년대까지는 재래종과 도입품종 등 온대형 자포니카 품종의 근연교잡을 중심으로 계통육종 기술이 발전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고 있는 벼 품종은 20세기 초기까지는 재래종들이 전국 농가에 산재되어 재배되었으나 품종의 쌀 수량성은 2.40톤/ha 내외로서 농가 평균 쌀 수량성은 0.9~1.1 톤/ha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1930년대까지는 일본의 재배벼가 도입되어 1940년까지 전체 벼 재배면적의 약 85%까지 차지하였다. 이들 도입 품종의 주요 특성으로서 쌀 수량성이 재래품종에 비하여 10~20% 높은 장점만으로도 그 재배면적이 급속도로 확대될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었으나 쌀 수량성은 3.20~3.60톤/ha 수준으로 농가 평균 쌀 수량성은 1.5~1.8톤/ha이었다. 1930년대에 국내 육성 품종이 보급 재배되면서부터 국내 벼 육종사업은 그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 1970년까지 36품종이 육성 보급되어 전체 벼 재배면적의 약 80%에 국내육성품종으로 대체되었다. 이 시기에 벼 육종체계는 자포니카 품종들의 근연교잡에 의한 계통육종법이 주종을 이루었으며, 주요 목표는 다수성, 내비성, 내도복성, 내병성(주로 도열병, 줄무늬 잎마름병) 등이었으나 재배벼 품종의 쌀 수량성은 3.50~4.0톤/ha로 향상되었으나 내비성이 낮고 도복과 병해충에 약하여 풍흉의 차이가 커서 농가평균 쌀 수량성은 2.7~3.3톤/ha에 머물러 쌀의 만성적인 부족현상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식량부족을 극복하기 위하여 1962년 농촌진흥청이 설립되고 그 산하에 벼 품종육성을 위한 연구 인력과 기반시설을 갖춘 전문연구기관을 두어 현대적인 기술체계를 구축하였다. 특히 1960 년대 중반이후는 국제미작연구소와의 국제협력체계가 갖추어지면서 인디카(열대지역적응) 벼의 단간직립 신초형을 이용한 인디카/자포니카 원연교잡 육종기술의 발전으로 1971년 최초로 우리나라 환경에 적응하는 단간직립 신초형 통일형 최초의 품종으로 "통일"의 육성에 성공하여 우리나라 녹색혁명의 기초가 되었다. 이 품종은 온대형 자포니카인 "Yukara"와 대만의 준단간 인디카품종인 "T(N)1"(Taiching Native 1)의 단교잡 F1을 준단간 다수성의 인디카 "IR8"과 Top Cross로 3원교 잡된 IR667조합(IR8//유카라/T(N)1)의 후대에서 선발 육성되었다. "통일"의 쌀 수량성은 5.13 톤/ha으로 기존의 자포니카 품종에 비하여 약 30% 향상되었으나 내냉성이 약하고 쌀 품질과 밥맛은 떨어져서 전국적인 확대재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 후 쌀 품질과 수량성이 크게 향상된 통일형 단간 다수성 품종의 개발보급에 노력하여 1980년까지 밀양23호, 유신, 금강, 내경 등 통일형 25품종이 개발 보급되면서 이들의 재배면적이 크게 확대되어 녹색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들 통일형 품종들은 직립형의 초형을 가지고 키가 작아 도복에 강할 뿐만 아니라 내비성이 강한 다수성으로서 자포니카에 비하여 그 당시 도열병, 호엽고병, 백엽고병 등 내병성에 강한 특성을 가짐으로서 그야말로 그동안 우리나라 벼 육종가들이 갈망해 왔던 벼의 이상초형을 탄생시킨 것이다. 1970~1980년대에 육성 재배된 통일형 품종 수는 40품종(메벼 37, 찰벼 3)에 이른다. 이러한 통일형 품종의 육성은 우리나라 벼 육종의 새로운 초석을 마련했을 뿐만 아니라 온대지방에서 인디카/자포니카 품종을 실용화 할 수 있는 역사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2. 벼 통일형 품종의 재배기술 개발
다수성 벼품종의 개발 및 이들의 확대보급으로 벼 재배기술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와 녹색혁명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리나라 벼 재배기술은 14세기 고려시대까지는 주로 직파재배 기술이 이루어 졌으며 조선초 15세기에는 이앙재배가 시작되어 병행되었으며 16세기에 전국으로 확대 보급되었다. 근대적인 벼재배기술의 정착은 1906년 국립 농업연구기관(권업모범장)이 설립되면서 육묘방법, 이앙방법, 본답관리 및 재해대책에 관한 표준재배기술들이 본격적으로 구사되면서 손이앙기술이 정착 되었다. 1945년 해방과 1950년대 한국전쟁이후 농사원을 거처서 1962년 농촌진흥청으로 발전되면서 현대적인 벼 재배기술이 과학적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1970년대 초 다수성인 통일형 품종의 개발보급으로 벼 재배기술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통일형 품종은 자포니카 품종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일장감응성이 낮아 충분한 생육기간의 확보가 요구될 뿐만 아니라 성숙기 고온을 요구하므로 등숙온도 23~24℃를 확보하도록 4월 하순의 조기육묘에 의한 안전출수한계기 이전에 출수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한 재배기술이었다. 그러나 못자리 기간 동안의 저온 때문에 기존의 육묘기술로서는 정상적인 재배가 불가능하여 저온시기에 조기보온육묘기술의 개발 등 벼 육묘기술의 일대 변혁을 가져왔다.
벼 육묘기술은 1960년대까지는 대부분이 물못자리에서 육묘하였으나, 1971년 "통일"이 보급된 이후부터는 폴리에칠렌 필름을 이용한 비닐보온절충못자리가 시작되어 모판은 지면으로부터 30~40cm 띄우는 터널식으로 개선 보급되어 1978년에는 91%나 보급되었으며, 못자리설치는 종전의 5월 1일경에서 4월 15일경으로, 동시에 이앙시기도 종전의 6월 5일경에서 5월 25일경으로 크게 앞당겨졌다. 이앙거리는 30 × 12~15cm로서 적정재식밀도는 ㎡당 73주에 주당 3~5묘이었다.
본답시비방법은 1920년 이전까지는 퇴·구비, 대두박, 청예대두, 유박, 골분, 인분뇨, 초목탄 등 농가 부산물로서 자급비료를 사용하였다. 1930년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유안이 생산됨에 따라 화학비료로서 질소, 인산, 칼리 3요소 비료의 복합시용이 수행되었으며, 1960년대 까지 표준시비량은 성분량으로 ha당 질소 80kg, 인산 50kg, 칼리 60kg으로 낮았다. 1970년대 통일형 품종 보급 이후에는 표준시비량으로 통일형 품종은 ha당 질소 150kg, 인산 90kg, 칼리 110kg으로 크게 증가되었으며, 질소비료 분시방법은 기비 50% - 분얼비 20% - 수비 20% - 실비 10%로 하였다. 자포니카 품종의 적정시비량은 ha당 질소 110kg, 인산 70kg, 칼리 80kg이었다.
또한, 다수확재배를 위하여 다비·밀식, 합리적인 물관리, 정기 및 동시 방제를 통한 효과적인 병해충 방제기술이 크게 발전되었으며, 저위생산논의 물리·화학성을 개선하기 위하여 유기물 및 규산 시용, 객토 및 심경을 통하여 논 토양의 개량과 지력을 증진시킴으로써 통일형 품종의 다수확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1973년부터 1987년까지 전국 통일형 품종의 ha당 평균수량이 4.71 톤이었으나, 같은 기간에 통일형 품종으로 다수확재배를 실시한 농가의 수량은 8.94톤으로 1.9배나 많아 다수확재배기술에 의한 수량증가가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통일형 품종의 안정적인 재배기술 개발은 폴리에틸렌 필름(vinyl)생산 및 비료·농약 생산 등 농자재 생산산업, 농기계산업 등 다양한 관련산업의 동반성장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비닐을 이용한 비닐보온절충못자리기술의 발달로 비닐산업이 크게 발전하므로써 1980년대 채소 등 소득작물의 시설재배기술이 향상되어 녹색채소의 주년생산체계를 이룩하는 소위 "백색혁명"의 계기가 되었다.
3. 벼 통일형 품종과 새기술의 현장 보급
녹색혁명의 성공은 벼 신품종 및 새로운 재배기술들을 농가현장에 신속히 보급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새 기술이 농가에 신속히 보급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연구개발과 기술보급을 동시에 관리할 수 있는 구조적 체계의 확립이라 할 수 있다. 1962년 농촌진흥청의 설립으로 연구기능과 기술보급이 동시에 관리될 수 있는 체계를 갖춤으로써 녹색혁명의 조기 성취가 가능하였다.
녹색혁명을 위한 새 기술의 보급과정에는 보수적인 농업인들에게 한번도 재배해 보지 않은 통일형 품종의 특성을 이해시키고, 농업인 스스로 품종을 선택하고 새 기술을 실천하게 하였다. 겨울농한기에 새마을영농기술교육을 통하여 전 농업인에게 벼농사교육을 실시함은 물론, 신문, TV, 라디오, 새마을엠프방송 등 홍보매체를 활용하여 새 기술을 신속히 확산 보급하였다. 또한, 영농기에는 농사정보 및 병해충예찰정보를 발표하여 농업인이 실천토록 하였다. 일선 농촌지도사는 관내 농가포장을 순회하면서 현장기술지도는 물론, 병해충에 대한 예찰 및 방제지도업무를 수행하였으며, 벼농사 취약지역 및 문제지역을 중심으로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을 신속히 해결하기 위하여 쌀 생산 전문기술지원단의 운영 등 다방면으로 영농현장의 기술지도에 임하였다.
농작업별 이행시한을 지정하여 일손돕기 운동 전개, 모내기나 벼베기, 통일형 품종 책임면적 시달, 식량증산상황실 운영, 이를 수행하기 위한 지시사항을 담은 친서 배포, 인쇄물이나 보도매체를 통한 홍보활동 등을 통하여 소위 시한영농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또한 농업인의 쌀 증산 의욕을 북돋우기 위한 쌀 다수확시상제의 실시 등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적극적인 행정지원이 뒷받침 되었다.
4. 녹색혁명의 성과
가. 쌀의 자급 달성
1971년 단간직립 다수성의 신초형 "통일" 품종의 보급 이래, 미질과 쌀 수량성이 개선된 "통일형" 품종이 개발되고 이들 품종이 확대 보급됨으로써 1974년 쌀 3086.7만석(4,445천톤)을 생산하여 쌀 자급수준에 도달하였다. 1975년부터는 연속적으로 자급수준을 넘어서는 쌀이 생산되었으며, 1977년에는 농가평균 쌀수량성이 4.94톤/ha으로 세계 최고 수량성을 기록하면서 쌀 총 생산량이 6,006천 톤에 달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쌀 자급을 확고히 하였다. 한국에서의 녹색혁명을 달성한 것이다.
쌀의 자급수준에 이른 1974년 이후에는 농가소득이 계속 도시근로자소득을 앞지르게 되었다. 농업인들은 정부를 신뢰하게 되었고, 농촌지도기관의 지도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면 틀림없이 성공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다수성 신품종 보급을 계기로 이루어진 비닐보온못자리의 확대 설치는 벼 조기이앙, 조기수확을 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영농시기의 변화는 농번기 노동력의 경합을 완화시키고 답리작재배도 확대시킬 수 있게 하였다.
신품종이 확대 보급되고 쌀이 증산되자 정부는 추수기의 가격하락을 방지하고 농가의 소득증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수매를 지속하게 되었고, 농업인들은 생산물의 자진출하는 물론 수매량 확대를 정부에 요청하게 되었다. 이제 정부의 쌀 수급정책은 소비절약에서 소비조장으로 그 방향이 전환하게 되었다.
나. 녹색역명의 파급효과
쌀의 자급달성은 주식에 대한 걱정을 없게 하여 국민생활의 안정을 가져왔고, 농업인으로 하여금 희망과 자신을 갖고 정부시책에 호응할 수 있게 하였다.
통일형 품종이 본격 보급되어 쌀 증산으로 자급이 이루어짐으로써 국가경제성장은 물론, 외미도입 중단에 따른 외화지출을 절감함으로써 정부가 공업화 및 수출정책을 강력히 추진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73년부터 1989년까지의 통일형 및 자포니카 품종의 증수에 따른 수익성 분석 결과, 그 증수액은 1977년에 1조3,891억70백만원에 이르렀으며, 연평균 증수액이 5,294억12백만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쌀 증산에 의한 사회적 수익(국가경제기여)은 1978년도에 7,443억2백만원으로 추정되었고, 기술개발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부족분을 수입으로 충당하는 경우, 증수에 의한 외화 절약분을 산정해 본 결과 1978년도의 외화 절약액은 8,336억18 백만원, 연평균 3,297억35백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계측되었다.
또한, 쌀 증산에 따른 농가의 소득증대로 농가부채가 줄어들고 저축이 증대하여 농업재투자를 위한 자본이 축적되는 효과가 있었다. 농가소득증대로 농촌의 생활문화수준이 높아지고, 도시근로자의 양곡구입비 부담이 줄게 되었다.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쌀 수급이 수월해짐에 따라 주식이 맥류, 잡곡 등의 혼식에서 쌀 위주로 바뀌어 쌀의 소비량이 늘고 식량의 소비구조가 변화하였다.
통일형 품종의 육성·보급과정을 통하여 얻은 기술과 경험은 1980년대 자포니카 벼 품종개발은 물론, 보리·콩·채소·과수 등 다른 농작물에도 파급되어 농사 전반에 걸쳐 획기적인 기술혁신을 가져왔다. 통일형 품종의 집단재배, 농작업의 협업화 및 공동화 등을 통하여 일손부족, 기계화영농 등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을 하였다.
5. 시사점
가. 녹색혁명을 단기간 내에 성취할 수 있었던 요인
우리나라는 온대지역 벼 재배 국가들 중 최초로 인디카/자포니카 원연교잡에 의한 반왜성 준단간 직립 신초형의 내병, 내도복, 다수성 벼 품종육성에 성공하였다. 통일형 품종의 경우 잡종불임의 문제점 극복에 성공함으로써 온대지역 자포니카 재배지역에 인디카 유전자원 이용의 새로운 기술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다수성 신품종 벼 품종개발의 성공은 무엇보다 육성계통들의 효율적이고 정밀한 선발 검정체계에 의해서 좌우된다. 농촌진흥청에 벼 연구를 위한 전문연구기관을 설치하고 전국을 망라한 선발 및 검정체계를 확립함으로써 육종의 효율을 높이고 신품종 개발을 촉진하게 되었다.
1967년 이후 국제미작연구소와 협력연구가 추진되어 매년 겨울동안 IRRI 포장에서 육성계통의 세대촉진과 유망계통 및 신육성 품종의 종자증식을 실시하였다. 또한 세대단축온실의 신축(1969년)으로 연중 벼 인공교배가 가능해졌다. 그 결과 벼 품종 육성기간이 14~15년에서 7~8년으로 단축되었고, 신품종의 농가보급기간도 단축되어 우리나라 녹색혁명을 조기에 달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1971년 신품종 시범재배의 시작을 계기로 매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농한기에는 농업인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전통적인 영농에서 과학적인 영농기법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져 영농기술이 크게 개선되었다. 정부와 각 방송국의 협조로 라디오와 TV를 활용한 영농기술교육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신품종의 농가실증시험재배를 전국적으로 그리고 집단재배단지 규모로 확대하여 농업인에 대한 신품종 현장교육장으로 활용하고, 거기서 생산된 종자를 그 지역 농업인에게 보급함으로써 신품종을 단기간 내에 농가에 확대 보급할 수 있었다. 근면·자조·협동하는 새마을운동은 농작업의 공동작업, 영농기자재의 공동이용 등은 물론, 한발, 홍수, 저온, 태풍 등 기상이변을 당하였을 때 협동심을 발휘하여 슬기롭게 재난을 극복할 수 있게 하였다.
식량증산에 대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와 각별한 관심으로 주곡자급이 국정의 주요과제가 되면서 범정부 차원에서 식량증산을 추진하고 총력을 기울인 것이 또한 주곡자급을 앞당기게 된 큰 요인이었다. 정부의 지속적인 고미가정책과 추곡수매량의 지속적인 확대, 비료·농약·비닐 및 골재 등 생산자재의 원활한 공급 등 다양한 행정지원은 재배농가의 소득증대와 더불어 증산의욕을 크게 고취시켜 주었다. 1973년부터 실시한 벼 다수확 시상제는 농가호당 10만원이라는 파격적인 시상금을 무제한 지출하면서 1976년까지 4년간 계속되었는데 다수확재배를 유도하는 큰 요인이 되었었다.
나. 교훈
식량증산에 대한 국가지도자의 높은 의지와 관심으로 주곡자급이 국정의 주요과제가 되면서 범정부 차원에서 식량증산을 지원하게 되었고, 중앙과 지방의 전 행정력이 동원되어 치밀한 계획과 높은 강도로 총력을 기울인 것이 주곡자급을 앞당기게 된 큰 요인이었다.
다른 산업의 발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업부문의 발전에도 기본 인프라의 구축과 생산성 향상에는 투자재원 마련이 가장 중요했다. 1,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성공적으로 추진되고 국가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공적자금(재정, 차관, 금융 등)의 지속적 투입으로 농업용수개발과 경지정리 등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반을 적극 조성하면서 농지소유 및 농지보전제도를 개선하는 한편, 비료·농약 등 농자재를 원할히 공급하는 등 식량증산 지원정책을 강화해 나갔던 것이 주곡자급의 한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정부는 1962년 농업기술개발정책의 효율적인 관리운영을 위하여 농촌진흥청을 발족시키고 연구조직을 전문분야별로 확대 개편하여 현대적인 시험연구체계를 갖추었다. 농촌진흥청은 농업기술의 연구·지도·보급 기능을 일원화한 조직체계로서 연구기관에서 개발된 새 기술을 농촌지도조직을 통하여 신속히 농가에 보급하는 한편, 영농현장에서 발생되는 애로기술은 지도사업을 통하여 발굴, 연구사업에 반영하여 해결하는 연계체계를 갖춤으로써 새 기술의 농가보급 및 기술개선을 신속하게 할 수 있었다.
쌀의 자급을 이룬 "녹색혁명"의 결정적인 동인은 1970년대 초, 다수성 신품종 "통일"과 통일형 품종의 개발에서 기인된다. 정부의 주곡자급정책에 발맞추어 벼 육종가들이 키가 작고 수량이 많은 새로운 초형의 벼를 개발한 것이다. 벼 육종가들은 지금까지 이루지 못한 인디카와 자포니카 품종의 원연교잡에 성공하여 획기적인 다수성을 보이는 신품종들을 개발하였고, 필요한 재배기술을 개발하여 신속히 농가에 보급한 것이 가장 큰 쾌거이다.
다수성 통일형 품종의 개발 성공은 연구기관(농촌진흥청)과 학계(농과대학) 및 국제기관(국제미작연구소)과의 긴밀한 협력의 산물이었다. 특히 국제미작연구소와의 긴밀한 협력으로 연구원의 교류와 훈련, 시설 및 자료를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겨울 동안에는 국제미작연구소 및 필리핀 농가포장에서 종자를 증식하고 채종함으로써 신품종의 육성 및 농가보급을 1년씩 앞당길 수 있었고, 따라서 쌀의 자급도 앞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다. 우리나라 녹색혁명 경험의 개도국 적용 가능성
식량부족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에서는 식량증산을 위한 녹색혁명사업의 추진이 필요하다. 영농규모가 작은 국가들에는 우리나라의 소농체제 농법의 적용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자연자원과 환경이 불리한 조건에서도 선진국 수준의 농업기술과 생산성 혁신을 이룩한 우리나라의 발전 경험과 노하우는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좋은 발전 모델이 될 것이다.
식량의 증산을 통한 농업혁신을 위해서도 투자재원의 확보가 가장 큰 관건이다. 자연자원의 개발이나 제조업 등 농업 이외의 다른 분야에서 농업투자 재원 형성이 가능한 나라에서는 정부가 가용한 재원을 농업분야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농업생산 인프라 구축 및 기술혁신 등 다양한 측면으로 접근하면 비교적 단기간 내에 획기적인 식량의 증산 및 현대적 농업으로의 혁신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농업 외에 별다른 기동력(Driving force)을 찾기 어려운 나라에서는 농업 내부에서 경쟁력 있는 특정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하여 경쟁력 있는 산업으로 발전시키고, 이를 동력으로 하여 국민식량의 증산을 위한 사업에 투자함으로써 점진적으로 식량증산을 해나가는 녹색혁명 모델이 가능할 것이다.
식량증산을 통한 녹색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국가지도자의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정부의 필요한 투자와 농업 인프라 구축, 새 기술의 개발과 신속한 보급을 위한 효율적인 조직체계, 국내외 관련기관과의 긴밀한 협력체계가 요구된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당사자인 농업인의 의식과 이를 뒷받침 해줄 수 있는 국민적 동의와 공감대의 구축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