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에서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이란 식량이 부족한 개발도상국에서 품종개량과 농업의 인프라 확충을 통하여 단위면적당 식량 작물의 생산성을 높여서 식량을 자급함으로써 경제개발의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용어이다. 반면에 백색혁명(White Revolution)이라는 용어는 공식화된 것은 아니며 온대성 기후대에 위치하여 겨울철에 채소류의 생산이 불가능한 한국에서 시설재배용 온실(Greenhouse)을 비롯하여 노지에서의 지표면 멀칭, 터널, 비가림 등으로 비닐의 사용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비닐로 피복된 토양의 색깔이 기존의 나지토양에 비할 때 희게 보인다고 해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지금은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이다. 본고에서는 한국농업에서의 백색혁명을 1970년대 중반에서 1990년대 사이의 시설재배 면적이 급속히 확대되고 채소생산의 주년화를 위하여 온실의 구조와 자재 및 각종의 설비와 기술 등이 현대화된 과정에서 발생한 변화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이렇게 짧은 기간에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시설재배 면적이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이 현상을 백색혁명(White Revolution)이라고 부를 정도로 거대한 변화가 가능하였던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국가적 정책과 함께 경제발전의 뒷받침이 있었다. 국가정책으로서는 1962년부터 시작된 수차례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이에 따라 신선채소의 소비시장이 형성되어 겨울철에 비닐하우스에서 생산된 채소류가 시장경제 체제로 생산되고 소비될 수 있었다는 점, 즉 생산과 소비의 선순환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국가경제의 자립기반에 목표를 두고 식량과 에너지 자급을 위한 농업증산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비료공장과 정유시설들이 착공되었으며 기간 중(’62~’66) 연 평균 7.8%의 경제성장률을 나타내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67~’71)은 수출기반에 국가경제의 목표를 두고, 농공병진 정책을 추진하면서 석유화학공업단지가 준공되어 폴리에틸렌을 비롯한 비료와 농약 등의 농자재 공급이 원활해졌다. 대나무를 골조로 한 초기형태의 비닐하우스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였으며, 기간 중 연평균 9.7%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였고, 또 이 시기에 새마을운동이 시작되었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72~’76)은 도약기반에 국가경제의 목표를 두고 철강 등의 중화학공업단지가 준공됨에 따라 비닐하우스의 골조를 대나무에서 철골로 바꾸는 시설현대화가 진행되었으며 기간 중 연평균 10.1%의 기록적인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였으며, 주곡인 쌀의 자급이 달성되면서 신선채소의 소비욕구가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였다. 그리고 이어진 제4차 5개년계획 기간에는 5.8%, 제5차 계획기간에는 8.6%, 제6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기간에는 10.0%의 성장률을 기록하여 한국의 경제는 빠른 속도로 발전되었다.
한국농업에서 시설재배가 본격화된 계기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 중에 실시된 농특사업(농어민 소득증대 특별사업)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평가된다. 농특사업은 농림부 주관으로 시작되었는데, 제1차 농특사업은 1968년에 시작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6개 부처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특별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작물 복합주산단지를 조성하여 1971년까지 정부 차원에서 다양한 투자를 실시하였다. 사업의 평가결과 ‘비닐하우스 채소생산’ 사업은 성과가 아주 좋아 농림부에서는 시설을 현대화하기 위한 ‘비닐하우스 표준화 계획’을 발표하였다. 1972년부터 시행된 제2차 농특사업에서 이를 대폭적으로 확대하여 사업을 추진하던 중,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이 큰 효과를 보임에 따라 1974년부터는 농특사업을 새마을사업과 통합 추진하여 1970 년대 후반부터 시설재배 면적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한국에서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시설재배가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새마을운동과 함께 이를 뒷받침한 석유화학 산업과 철강 산업의 발달 덕분이었다. 한국은 석유가 생산되지 않는 비산유국으로 1960년대까지는 농업용 폴리에틸렌을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였고 시설재배 면적도 매우 미미하였다. 그러나 1970년에 석유화학공업단지를 준공하여 농업용 플라스틱을 염가로 농가에 보급하게 됨으로써, 겨울철 비닐하우스 채소생산이 한국농업에서 중요한 재배 작형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1973년에 준공된 포항종합제철에서 시설재배용 비닐하우스의 골조를 만들 수 있는 철제품을 생산 공급하여 줌으로써 그 이전에는 주로 대나무를 외피복용 시설골조로 이용하였던 비닐하우스를 철골자재로 신속하게 개선하여 시설의 현대화가 가능하였다.
시설재배 면적이 크게 증가된 백색혁명 기간 중에는 한국의 원예농업에서도 큰 변화가 진행되었다. 대부분의 작물생산이 노지에서 시설재배로 전환되어 시설원예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였다. 채소 생산액 중에서 시설재배가 차지하는 비중은 1970년 1.5%에서 1995년에는 33.3%로 크게 증가하였고, 재배면적 단위로는 1%에서 20%로 증가되었다.
시설재배가 시작된 초기에는 배추, 상추, 오이 등 저온성 채소류가 주로 재배되었지만, 재배기술이 정착됨에 따라 수박, 참외 등 고온성 과채류가 많이 재배되었고, 단경기를 극복하여 채소생산과 공급의 계절적 제한이 없어진 주년생산(year-round production)이 달성되었다. 재배작물의 많은 면적이 시설 내로 유입되어 딸기와 같은 작물은 시설재배 면적이 1970년에 2%에서 1995년에는 98%로 증가되어 노지에서의 생산은 거의 사라지고 대부분이 시설 내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백색혁명의 초기 단계에서는 채소류의 생산이 주로 이루어졌으나 그간 과수와 화훼류의 시설재배도 크게 증가하였다. 감귤과 포도 재배의 많은 면적이 시설재배 또는 비가림재배 작형으로 빠르게 바뀌었고 장미, 국화, 백합, 각종 분화류 등의 화훼작물 재배도 시설재배 형태로 급속히 전환되었다. 과수 시설 재배는 시설 연동화, 대형화에 기술적으로 크게 공헌하였으며, 화훼의 시설재배는 광환경이 우수한 유리온실 등의 고급 시설이 이용되면서 기존의 토양재배에서 베드를 이용한 양액재배로 전환되는 등 시설 내 작물재배 환경 개선 및 자동화 등 기술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시설재배 면적의 원활한 확대에는 기술개발과 보급의 역할이 매우 컸다. 대나무 골조의 비닐하우스를 철재골조로 개선하기 위하여 국가적인 시설표준화 사업으로 농촌진흥청 원예시험장(현 국립원예특작과학원)과 대학들이 공동으로 시설구조를 표준화하였다. 이를 통해 여러 가지의 낭비적인 요인을 제거하여 효율을 크게 높였고, 재배농가에서는 다양한 설계의 시설을 설계비용을 들이지 않고 선택하여 시공할 수 있었다. 한편 노지에서 주로 재배되었던 작물을 시설재배로 전환할 경우에는 시설 환경에 적합한 새로운 품종이 필수적인데, 우수한 육종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종묘회사에서 시설 재배용 적품종을 수시로 개발하여 농가에 보급하였다. 민간 종묘회사에서 품종개발을 하지 않았던 딸기, 토마토, 멜론 등의 작물은 원예시험장 주도로 우수한 품종을 개발 보급하였다.
시설 내에서 작물재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기술이 필요하다. 경기도 수원에 위치한 원예시험장 채소재배과와 부산에 위치한 시설원예시험장의 주도하에 시설의 구조 외에도 시설 내의 온도 조절을 위한 피복기술과 난방기술, 시비량 조절과 관수 및 관비재배 기술, 토양의 연작장해 경감기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탄산가스 시비기술, 육묘기술 등과 각종 환경조절을 복합적으로 제어 하기 위한 장치기술 등이 개발되었다. 이들 기관은 농가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현장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한국에서 녹색혁명은 당시 국가의 절대적 과제였던 식량의 자급이라는 시급성에 따라 국가주도로 진행되었다. 어떤 특정한 분야에서는 강제성을 가지기도 하였으며 생산농가에서 국가의 방침을 따르도록 유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백색혁명의 추진과정에서는 시설재배 농가에서 소득을 높이고자 하는 경제적인 목표가 뚜렷하였기 때문에 강제성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재배농가의 자율성에 따라 재배여부가 결정되고 생산농가의 수익이 상당기간에 걸쳐 보장되었으며, 생산물의 소비는 시장경제 체제에 맞추어 소비시장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매우 자연스러운 진행을 보였다.
기술의 보급을 위하여 국가기관이 중심이 되어 시설재배 확대를 위한 각종의 정책을 수립하여 예산을 지원하였고 기술교육을 위한 다양한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농가에서 자발적으로 기술을 획득하기 위하여 시험장이나 연구소를 방문하여 문의하거나 선진지 견학 등을 통하여 기술을 습득한 것이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국가기관에서 강제하거나 유도하는 기술보급 방식보다는 농가의 경제적인 필요에 의하여 스스로 기술의 원천에 접근하고자 하는 방식이 훨씬 효율적임이 시설원예 농업의 확산 과정에서 잘 증명되었다.
한국농업에서 시설재배의 확산으로 이루어진 백색혁명은 국가에서 육성한 석유화학 산업에서 농업용 폴리에틸렌을 싼 가격으로 농가에 공급할 수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리고 국가정책에 의한 철강 산업의 발달로 철재 구조 자재를 염가로 공급할 수 있어서 시설현대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러한 주변 배후산업의 발달과 동시에 추진된 새마을운동은 농가 소득을 증대시키기 위한 경제적 노력과 잘 일치하였다. 이에 따라 시설재배의 급속한 확산이 가능하였고, 시설재배로 생산된 농산물을 소비해 줄 수 있는 국민소득이 뒷받침되었기에, 백색혁명이 원활하게 진행되어 지금의 한국은 국민 1인당 시설재배 면적이 가장 넓은 시설원예 기술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