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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목차
I. 서론 10
1. 연구 목적 10
2. 연구사 검토 12
1) 김소월의 경우 12
2) 백석의 경우 15
3. 연구 방법 20
II. 전기적 고찰을 통한 김소월과 백석의 비교 22
1. 김소월의 경우 22
1) 시대적 상황 22
2) 고향 및 가족 관계 25
3) 출신학교 및 교우 관계 30
4) 직업 및 사회 활동 35
2. 백석의 경우 38
1) 시대적 상황 38
2) 고향 및 가족 관계 40
3) 출신학교 및 교우 관계 41
4) 직업 및 사회 활동 43
III. 김소월과 백석의 시어 및 소재에 나타난 민족의식 47
1. 김소월 시의 경우 47
1) 방언 및 조어를 통한 민족의식 47
2) 민속적 소재를 통한 민족의식 72
2. 백석의 경우 89
1) 방언 및 조어를 통한 민족의식 89
2) 음식 및 민속적 소재를 통한 민족의식 113
IV. 김소월과 백석 시의 화자와 어조 비교 164
1. 김소월의 경우 164
1) 초기 시의 화자와 어조 164
2) 후기 시의 화자와 어조 168
2. 백석의 경우 171
1) 초기 시의 화자와 어조 171
2) 후기 시의 화자와 어조 176
V. 역사 및 사회 현실을 소재로 한 민족의식의 비교 185
1. 김소월의 경우 185
2. 백석의 경우 199
VI. 결론 205
참고문헌 211
부록 224
ABSTRACT 236
초록보기 더보기
김소월(1902~1934)과 백석(1912~1995?)시에 대한 기존 연구는 소월의 경우, 개인의 한을 노래한 민요조의 서정 시인으로 평가하고, 백석은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향토적 세계를 다룬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래서 이들을 민족 시인이라고 지칭하지는 않는다. 또한 두 시인의 작품에서 민족의식을 탐구한 연구는 이제껏 없었기에 소월과 백석 시에 나타난 민족의식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본 연구를 수행하였다.
소월이 작품 활동을 한 시기는 일제강점기 제2기인 문화정치기(1919~1931)에 해당한다. 이 시기는 3.1운동으로 위기를 느낀 일본이 무단정치 대신 문화정치를 표방하였지만, 민족분열정책을 전개하는 한편, 한국경제를 완전히 일본 경제에 종속시키려했던 시기이다. 한편 백석이 시작활동을 한 시기는 전시동원기(1931~1945)로 일제가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았고 이어 태평양전쟁(1941)으로 향해 가던 시기이다.
소월의 부친인 김성도가 일본인 인부들로부터 집단폭행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정신이상이 된 것은 소월의 작품과 생애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그의 막내 숙부는 상해임시정부, 큰 고모부는 105인 사건 등 민족운동에 관련되어 소월의 민족의식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가 수학한 오산학교는 독립운동가 이승훈이 세운 학교로 민족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세운 학교였기에 소월과 백석이 이 학교에서 수학하였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의 민족의식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된다. 오산학교와 배재고보를 거쳐 일본으로 유학을 간 소월은 그 해 관동 대지진으로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참혹하게 학살당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고 귀국한 일은 그의 민족의식에 크게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생각된다.
소월의 문학적 감수성에 영향을 준 사람은 큰 숙모 계희영이다. 소월은 숙모로부터 다양한 민담, 설화, 민요 등을 접하면서 민중적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획득했다. 그리고 소월이 김억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민요조의 서정시는 그의 민족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적절한 문학 장르라고 판단된다. 소월이 평생 동안 가졌던 유일한 직업은 신문사 지국 경영이었다. 신문사 지국 경영은 일종의 민족운동 또는 민중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판단된다.
백석은 그의 부친과 모친의 나이가 13년 차이가 나고, 그의 어머니가 기생이나 무당의 딸이라는 설이 있다. 백석은 어린 시절 몸이 허약하여 어머니가 그의 무병장수를 위해 치성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는 무속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성장했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민속, 설화, 그리고 무속 등 전통의 세계는 백석의 민족의식의 발현으로 해석된다.
한편 민족운동가 고당 조만식이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했기 때문에 백석이 간접적으로 민족의식에 노출되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된다.
백석은 오산고보를 졸업한 후 1930년 조선일보사 후원 장학생으로 일본 아오야마학원에 유학을 한다. 백석이 소월과 달리 외국문학, 특히 영문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은 그의 시에서 보이는 현대 모더니즘 시학의 영향을 짐작케 한다. 소월의 시에서 서구적 영향이 배제되어 있는 것과는 비교가 된다.
소월이 동아일보지국을 개설하여 사업을 한 것을 제외하고 특별한 직업이 없었던 것에 비해 백석은 나름대로 좋은 조건에서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백석은 1934년 일본 아오야마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바로 조선일보사에 취업하여 기자로 근무한다. 그러나 곧 이어 1936년 4월에 조선일보사를 사직하고 함경남도 함흥의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교편을 잡는다. 3년 후에 다시 조선일보로 돌아가지만 1년도 안되어 또 다시 사직한다. 그가 자신의 후원자인 방응모가 사장으로 있던 조선일보에서 안정된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마다한 것은 이 시기를 즈음하여 조선일보와 사주인 방응모의 친일행태에 대하여 그의 민족의식은 이를 수용할 수 없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결국 백석은 1940년 1월 만주로 갔고, 그 곳의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6개월가량 근무하지만 창씨개명 강요로 사직하고 이후 생계유지를 위해 측량보조원, 측량서기, 중국인 토지의 소작인 등의 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생활을 했다.
백석의 문단 활동은 소월과 유사성이 있다. 그것은 어떤 유파나 조직에도 가담하지 않은 채 혼자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리고 두 시인 모두 서울의 문단과는 항상 거리를 두고 그들의 시적 무대 또는 소재는 결국 자신들의 고향이 주가 되고 있다. 소월은 말할 것도 없지만 백석의 시에 서울은 등장 하지 않으며 그의 고향인 정주를 비롯한 북관이나 남녘만이 등장할 뿐이다.
소월 시에 표출된 방언의 빈도수는 〈표 1〉 에서와 같이 총 216편 중 34개였고, 백석은 〈표 5〉 에서와 같이 총 92편 중 99개였다. 소월 시의 방언사용은 백석과 같이 의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체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소월 시에서 방언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한자어 등의 관념어를 구사했던 다른 시인들과 달리 우리 고유어에 대한 선호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는 소월이 민족의식을 환기시키려는 의도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백석의 시에서 방언이 소월보다 월등하게 많이 구사된 것은 그의 시 형식이 서사 지향적기 때문이다. 소월과 백석이 자신들의 시에서 향토적 방언을 사용하여 사라져가는 모국어와 민족의 전통문화를 전승보존하려는 의도된 작업은 암울한 식민지 당대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해석된다.
한편 조어의 빈도수는 소월이〈표 2〉 와 같이 25개이고, 백석은 〈표 6〉 에서와 같이 11개이다. 소월의 경우 그의 조어들은 대체로 민요적 리듬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이 역시 민요조의 시를 적절히 구사하고 있다. 백석 시의 경우 조어는 소월과는 다르게 많이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은 향토의 음식을 소재로 한 것을 조사한 결과 〈표 7〉 에서와 같이 백석의 작품에서 추출된 음식 소재는 92편의 작품 중 71개였다. 이에 비해 소월의 작품에서 표출된 음식소재는 ‘밥’과 ‘술’ 단 두 개에 불과했다. 소월은 음악성을 토대로 한 전통적인 낭만주의 시인으로 미각이나 기타 감각 등을 시로 표현하는 시인은 아니었기에 이는 당연한 결과이다. 이에 비해 백석은 인간의 여러 가지 감각을 강조하는 모더니즘 시인이었기에 유달리 음식을 통한 미각적 심상을 형상화하게 되었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미각적 심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렸을 때 맛본 음식들을 통해 민족적인 감각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으로 판단된다. 요컨대 토속음식을 통해 당대의 조선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이다.
소월 시에서 민속적 소재를 추출한 결과 〈표 4〉 에서와 같이 13개였다. 반면 백석의 경우 〈표 8〉 에서 보는바와 같이 41개였다. 소월이 백석에 비해 그 빈도수는 낮지만 실제로 특정화된 민속적 소재 그 자체가 아닌 상상력 자체가 민중적인 생활방식을 토대로 한 것이기에 이러한 수치에 크게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백석의 시에서 민속적 소재가 특히 무속이 다수 표출되는 것은 그의 성장 배경이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민속 소재를 통한 민족 공동체의 환기는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판단된다.
소월은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된 시적 화자의 어조와 그 이후의 것이 다르게 나타난다. 전자가 여성적 화자의 애상적 어조로 민족의 한과 저항의식이 표출되고 있다면, 후자는 남성적 화자의 건강한 어조를 통한 미래지향적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소월의 생애와 전기를 살펴볼 때 그의 의식 안에 잠재해 있던 민족의식이 점점 후기로 갈수록 노골화되어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 백석의 『사슴』에서는 유년화자의 어조로 표출되지만, 후기에는 고결하지만 체념적인 성인 화자의 목소리로 대치된다. 소월과 달리 백석 시에서 화자의 목소리가 변용된 것은 가중되는 엄혹한 시대적 상황에 기인한다.
소월의 시에서 역사적 소재를 작품으로 형상화한 시도 몇 편 있지만, 당시에 실제로 있었던 소작쟁의를 소재로 한 작품도 발표했다. 이와 같이 사회현실을 소재로 한 소월의 시편을 확인해볼 때 그가 단순히 애상적인 노래만 부른 나약한 시인이 아니고 당대의 암울한 현실에 대한 첨예한 의식과 아울러 그의 민족의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석은 소월처럼 당시의 사회현실과 직접적 연관성 있는 소재를 다루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암시를 통해 가족공동체가 붕괴되어 가는 식민지 농촌현실의 실상을 투영시키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이 옛 고구려의 영토인 평안도 지역이었기에 이와 연관된 인물과 지명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소월과 백석이 민족, 민중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방언과 토속음식, 그리고 민속 등의 소재를 구사하여, 소월은 체화된 기층민중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백석은 그것을 모더니즘 방식으로 전경화 함으로써 식민지로 대변되는 근대와 일제에 대한 저항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조어 방식에서도 소월은 민요 리듬을 창출하기 위한 방식으로, 백석의 경우 이야기적 수법을 구사하기 위한 방식으로 활용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자의 어조에서도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나타내건 민족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냄을 볼 수 있었고, 순수 서정 시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현실, 민족의 역사를 환기하는 소재를 시에서 적잖이 사용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원문구축 및 2018년 이후 자료는 524호에서 직접 열람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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