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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목차

論文槪要 6

I. 머리말 10

II. 許穆과 그의 배경 12

1. 許穆 略傳 13

2. 許穆의 家門 16

1) 許穆의 家系 16

2) 許穆의 姻戚 23

3. 許穆의 師友 및 親交 관계 24

1) 師友 24

III. 許穆의 學問과 書藝 34

1. 許穆의 學問 傾向과 學風 34

1) 博學과 학문의 실천 추구 35

2) 古學的 學風 37

2. 許穆의 學風과 書藝觀의 연관성 39

1) 古文의 蒼古美 중시 40

IV. 許穆의 서예 42

1. 許穆 書風의 형성 배경 43

2. 許穆 書風의 특징 46

1) 眉叟 許穆 書의 바탕 48

2) 古文 수집과 古文의 체계적 복원 51

3. 許穆의 서예 53

1) 허목의 篆書 55

2) 許穆의 楷書 및 行·草書 64

2) 기타 66

V. 許穆 書風의 영향 67

1. 許穆 書風의 영향 67

1) 許穆 篆書風의 존숭 및 형과 정신의 추종 68

2) 許穆 篆書風의 수용과 形態 재현 76

2. 許穆 書風에 대한 당대의 평가 77

3. 許穆 書風의 의의 80

VI. 맺음말 82

參考文獻 87

참고표 1. 許穆 현존 필적(서체별·기년·추정 구분) 96

Abstract 125

도판목차

도1. 허목 82세 진영(이명기 임모) 102

도2. 羅州眉泉書院 記言木版과 『記言』 102

도3. 주대 금문 대우정과 대극정 103

도4. 위(魏) 삼체석경 103

도5. 설상공 역대종정이기 관지법첩 103

도6. 웅연석문 104

도7. 형산신우비 104

도8. 석고문 105

도9. 태산각석 105

도10. 玉箸篆 唐 李陽冰 106

도11. 무열왕릉비 전액 106

도12. 허목의 서체와 고문 비교 107

도13. 전중용 107

도14. 전대학 107

도15. 허목 수고본 고문운부(보물592호), 9책 108

도16. 허목 수고본 금석운부(보물592호) 108

도17. 척주동해비(1661) 현종2년 109

도18. 척주동해비 세부 109

도19. 허목 수고본 동해비첩(1661, 보물592호) 110

도20. 권태사 신도비명 110

도21. 河弘度墓碣銘 110

도22. 元天錫墓碣銘 篆額 111

도23. 李上佐佛畵跋 111

도24. 眉翁心畫 112

도25. 孝悌忠信 112

도26. 靑巖山水 112

도27. 許穆 篆書 汗柬文 병풍(부분) 113

도28. 유석 신도비명 113

도29. 이성구 신도비명 113

도30. 李曼神道碑 篆額 114

도31. 五老堂 114

도32. 愛君憂國 114

도33. 愛君憂國 인장 115

도34. 含翠堂 115

도35. 含翠堂 인장 115

도36. 含翠堂 발문 116

도37. 慶流亭 편액 116

도38. 二宜亭 편액 116

도39. 二宜亭 전경 116

도40. 忠孝堂 편액 117

도41. 모한재 편액 117

도42. 望雲庵 편액, 회연서원 117

도43. 광풍제월 편액 안동 운장각 118

도44. 李誠中墓表 118

도45. 채세영신도비명 119

도46. 낭선군에게 보낸 서간 119

도47. 허목 원고본 120

도48. 권규 권대임신도비 전액 120

도49. 체제공 뇌문비 121

도50. 이서우 풍담대사비 전액 121

도51. 이서우 이의배신도비전액 122

도52. 복창군 벽암대사비명 전액 122

도53. '碑'자 비교(벽암대사비-척주동해비) 122

도54. 식산 이만부 전적『古文』 123

도55. 식산 이만부 전적『식산당전법』 123

도56. 박영 신도비(洪時濟 篆) 124

초록보기

 본 논문은 許穆(1595~1682)의 서예에 대한 연구이다. 許穆은 17세기 南人의 대표 인물로, 退溪 李滉과 寒岡 鄭逑의 학통을 이은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이외에 학문적 관심에 의한 다양한 주변 학문의 연구 및 古學 연구 및 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書風을 이룬 書家였다.

본 연구는 미수체로 일컫는 許穆의 書體와 그의 書風을 이루는 데 있어 중요한 古文의 書風 구성과 형성에서의 관련성을 살펴보고, 현존하는 그의 필적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書風이 조선 17세기 당시와 후대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조선 書의 역사에서 미수 許穆과 그의 미수체는 기존의 조선 서예 경향에 있어 매우 이례적인 모습이다. 그는 松雪體, 石峯體 등 조선 중기까지의 書風을 대표하던 王羲之 書風이 쓰였던 남조 때 역시 이미 문자에서의 순수성을 잃고 변했다고 여기며, 국가의 기반을 확립하고 이상국가로 통치를 했던 三代의 문자가 가장 순수하고 본질적인 정신을 담았다고 여김으로써 그 시기에 만들어지고 쓰인, 古文과 篆書를 통해 三代 본질과 정신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문자를 기준으로 보자면, 고대 문자에 있어서 문자 형성 당시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 즉 본질로부터 변형이 덜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 문자의 형을 수용하고자 했다. 특히 이 점은 情神과 書風과의 관계, 이를 통해 반영한 許穆의 글씨체인 미수체의 서풍은 바로 이러한 이상 기준을 바탕으로 형상화했다는 상징성과 논리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의 글씨체는 상고 정신을 바탕으로 한 문자의 현실화라는 모습을 갖췄다고 할 수 있다. 즉 허목의 글씨체는 그가 추구하던 가장 순수하고 이상적인 정신인 상고 정신의 가치 회복과 이에 대한 시각적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학문으로서의 실천, 정신적인 실천, 아울러 古文을 중심으로 書에서의 조형적 실험과 실천으로써 상고정신을 시각화시켰다는 데 허목의 글씨체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의 글씨체는 현실에 대한 자성과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허목의 문집 『記言』은 허목의 서예와 그의 서풍 그리고 古學과 문자 연구 및 學書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현존하는 허목의 필적은 60대 이상의 것들이 대부분인 관계로 그가 고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서풍을 형성한 초기의 양상을 유추하는 것은 쉽지 않다. 60대는 그의 서풍이 무르익고 자신의 서풍을 분명하게 형성한 시기로, 이러한 기준은 그의 〈陟州東海碑〉의 글씨가 중요한 서체 기준이 된다. 〈陟州東海碑〉는 立碑 이후 파괴된 비를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大字銘은 67세의 舊本을, 碑文 본문인 小字는 新本을 사용하여 1709년에 다시 세웠다. 이를 통해 허목 글씨의 시기적 차이에 다소간의 차이를 볼 수 있다.

그의 서체의 변화는 70대 전서의 서풍의 차이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70세 이전의 서풍에서 주로 보이던 古篆과 小篆의 筆意 및 긴밀한 結構, 공간 구성에 있어 行間 여백이 다소 좁았던 점 등은 70대 이후 굴곡의 변화를 크게 하고 필선 표현에서 보다 여유롭고 과감한 표현을 진행시키게 된다. 특히 이는 〈陟州東海碑〉 이후 낭선군 소장 〈衡山神禹碑〉 탑본의 실견 이후 표현에서의 과감한 시도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허목이 진력한 학문은 古文學인 六經學이다. 그는 고문학을 통해 당시 현실에서 중국의 이상적 시대였던 三代의 治道를 재현하고자 했는데, 사상의 기반인 儒學의 해석에 있어 程朱의 해석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방향 기준을 삼대의 문물과 제도로부터 답을 찾고자 했으며, 이는 곧 당시의 문자에 대한 기준으로도 이어졌다. 허목은 순수하고 이상적인 정신과 가장 왜곡되지 않은 자연의 이치를 古文을 바탕으로 한 篆書를 통해 표현하고자 했으며, 이것은 곧 三代의 治道를 문자, 서법을 통해 재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夏殷周 시대의 동경과 이의 현실 구현을 기대하며 문자 또한 古文만을 선호했던 것도 이런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의 문자에 대한 연구와 실천은 尙古의 본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문자의 변형 이전의 상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 사고의 결과였다. 허목의 미수體는 이러한 학문적 기틀에서 先秦의 글씨 추구의 결과이며, 고문학 연구 결과의 상징이자 그의 상고정신을 표출한 것이며, 아울러 그 안에는 당시의 조선의 서단과 현실에 대한 비판 정신이 내재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그의 관점에서 서법은 무릇 古文이 지닌 蒼古美가 반영되어야 하며, 이러한 기준은 그가 篆書 외의 서체를 배재했던 이유가 되기도 했다. 기교와 생략, 때에 따라서는 변형을 필요로 하는 行 草書보다는 필법이 단순, 근엄한 기상을 지닌 상고시대의 글씨가 서체의 典範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기에, 古文은 바로 삼대의 이상 정신을 반영한 문자인 것이며, 蒼古한 기상을 지닌 尙古정신의 표상이 되는 것이었다. 전서에 있어서도 小篆과 玉箸篆에 대해서는 폄하적인 자세다. 전서 외의 서체에 대한 그의 시각이 변한 것은 이후 〈熊淵石文〉의 神書를 봄을 계기로, 그 이후 전서가 아닌 선진고문 이후의 서체라 하여도 蒼古함과 고문에서의 본질과 같은 高意가 깃들여 있다면 이를 수용하고 인정하는 입장으로 변했다.

허목이 書의 학습에 있어 중요시 한 것은 특정 書家의 書風의 模寫에 앞서 그 글씨에 내재된 書家의 정신을 본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서예가 거경과 주정에 의한 수양의 한 방편임을 강조한 당시 사대부들이 가졌던 서예에 대한 공통적인 인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당시의 서예에서의 현상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허목은 이를 비판한 것이었다.

허목의 書風의 영향은 그의 활동 당시인 17세기와 18세기에 이어지며 후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같은 시기에서도 허목의 서풍에 영향을 받고 이를 진력하여 따르던 인물들은 허목과 사상적, 학문적, 정치적 입장이 같았던 남인 계열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많은 부분을 시사한다. 허목의 서풍 영향의 현상은 곧 학문적 영향과 계승과 관련이 있으며, 허목의 학문이 남인 특히 近畿南人계열을 통해 계승되었다는 점과도 연결 지어 볼 수 있다. 특히 이들은 허목 서풍의 形과 동시에 그 글씨에 담긴 정신을 온전히 본받고자 했던 점에서, 당시 허목 서풍의 形을 따르는 양상과 비슷하면서도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近畿南人계열의 활동을 바탕으로 미수 서풍 영향은 경향 근기영역 뿐 아니라 동시에 영남일대로의 확산에도 기여했다 할 수 있다.

그의 글씨에 대한 평가는 黨色에 따라 분명한 대비를 보여준다. 南人과 少論系 인물들의 미수 서풍에 대한 극찬과 우호적인 시각을 보이는 평가를 남긴 데에 반해, 西人과 老論系는 허목의 서풍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던 점은 하나의 書風이 학문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수용되고 비판되는 양상이 당대의 현실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허목의 가지는 문자연구의 학서과정과 서의 탐구와 학서과정에 있어서 정신성과 이상의 기준을 바탕으로 진행하는, 즉 학서의 이론적 기반과 서예적 실천이라는 과정이 일관되게 이루어졌던 그의 서풍에 대해 살펴보았고, 한 서풍에 있어 그 영향이 黨色과 중요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특히 조선의 17세기~18세기에 분명히 보여지고 있음을 허목의 서풍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서풍과 학풍, 학맥과 당맥의 연관성은 특히 조선시대 중기 이후 서예의 양상에 있어 간취되는 중요한 특징이자, 그 발전에 있어서도 학맥과 당파와의 관계 및 서풍의 영향이 밀접한 관련성이 있음을 허목의 서풍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허목은 글씨를 통해 이상시대의 현실 구현을 희망했으며, 이는 그의 현실의 삶에서도 동일했다. 그의 이상과 현실 실천을 그대로 반영한 서풍의 가치 및 그의 글씨가 갖는 영향은 허목이라는 한 인물의 서풍의 특징과, 당시의 학문적, 사상적, 정치적 입장으로 구축된 배경 환경, 즉 〈학맥과 당색〉이 한 시대의 예술적 흐름과 중요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