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호기사보기
기사명 | 저자명 | 페이지 | 원문 | 기사목차 |
---|
대표형(전거형, Authority) | 생물정보 | 이형(異形, Variant) | 소속 | 직위 | 직업 | 활동분야 | 주기 | 서지 | |
---|---|---|---|---|---|---|---|---|---|
연구/단체명을 입력해주세요. |
|
|
|
|
|
* 주제를 선택하시면 검색 상세로 이동합니다.
표제지
목차
국문초록 13
I. 《겸산유고(謙山遺稿)》해제 16
1. 겸산의 생애와 사상 16
2. 겸산의 연보 23
3. 서지적 고찰 25
4. 《겸산유고》의 사료적 가치 28
5. 결어(結語) 42
II. 《겸산유고》 역주의 필요성과 방법 44
1. 《겸산유고》활용 사례 44
2. 역주의 필요성과 범위 44
3. 역주(譯註)의 방법 45
III. 《겸산유고(謙山遺稿)》 역주 47
1. 권1 시 〔卷之一/詩〕 47
1) 석전을 읊다 〔石田吟〕 47
2) 서성루에서 기쁨을 표하는 운을 차운하다. 〔次西城樓志喜韻〕 47
3) 아들을 경계하다 〔戒子〕 49
4) 도하 유광희에게 수답하다 〔酬柳陶下 光熙〕 3수 50
5) 한식날 산정에서 멀리 바라보다 〔寒食山亭遠眺〕 51
6) 이른 보리를 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읊다 〔見早麥口占〕 52
7) 꽃 피는 시냇가에서 시회를 하다 〔花溪詩會〕 52
8) 석문에서 시회를 하다. 〔石門詩會〕 2수 53
9) 용흥사의 송은 스님과 함께 자다 〔與龍興寺僧松隱宿〕 54
10) 산정의 이른 봄 〔山亭早春〕 54
11) 소백 나명숙 형과 함께 밤에 이야기하다 〔共小柏 羅兄明淑夜話〕 55
12) 다시 산정에서 놀다 〔再遊山亭〕 3수 56
13) 생각나는 대로 읊다 〔謾吟〕 57
14) 밤에 이야기하다 〔夜話〕 58
15) 봄을 보내며 〔餞春〕 58
16) 다보사에서 자다 〔宿多寶寺〕 59
17) 계당에서 모여 이야기 하다 〔溪堂會話〕 60
18) 면양재의 작은 모임 〔勉養齋小會〕 60
19) 동정에서 시회를 하다 〔東亭詩會〕 61
20) 계당에서 재회하다 〔再會溪堂〕 61
21) 심향사에서 놀다 〔遊尋香寺〕 62
22) 계당의 여름날 〔溪堂夏日〕 63
23) 향교에 거접할 때 여러 유생들과 화답하다 〔鄕校居接時與諸生唱和〕 6수 63
24) 소백 나영집의 벽상운을 차운하다 〔次小柏羅英集壁上韻〕 66
25) 금파 나윤후와 수답하다 〔酬錦坡 羅允煦〕 67
26) 까치집 〔鵲巢〕 67
27) 기이한 돌 〔怪石〕 68
28) 속마음을 터놓다 〔述懷〕 3수 68
29) 여유로움 〔漫成〕 2수 70
30) 대광보국숭록대부 계정 민영환이 순절하였다는 것을 듣고 읊다 〔聞桂庭 閔輔國泳煥殉絶吟〕 71
31) 남보 기주현 형의 회갑 운을 차운하다 〔次南步 奇兄周鉉回甲韻〕 짧은 서문울 붙이다 〔倂小序〕 72
32) 소백 나형 명숙의 회갑운을 차운하다 〔次小柏 羅兄明淑回甲韻〕 73
33) 서울을 여행하다 객지에 머무르며 회포를 쓰다 〔西遊寓懷〕 7수 74
34) 삼가 오은 기윤보씨 선배의 환갑 운을 차운하다 〔謹次奇丈梧隱 允甫氏晬韻〕 78
35) 함평 월악에 8열문이 있는데, 지난 정유년에 생령들이 어육이 되는 화를 입을 때, 많은 여인들이 포로로 잡혀가다가, 8명의 열부들이 칠산 바다에 투신하여 같은 날 순절하였다. 그 후 회갑년을 맞이하여, 자손들이 그 바다 위에서 섶을 태우며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원래 운이 있어 삼가 보운하여 2수를 짓다. 〔咸平 月岳有八烈門, 往在丁酉生靈魚肉, 婦女多被擄八烈投七山海同日殉節. 其後値回甲年, 則子孫望祀于海上, 有原韻謹步二首〕 78
36) 무술년(1898년) 여름 해남의 윤충하가 와서 여러 달 머물다가 헤어짐에 임하여 시를 보내다 〔戊戌夏海南 尹忠夏來留數朔臨別贈詩〕 2수 80
37) 오은 기윤보를 애도하며 〔挽梧隱 奇公允甫〕 81
38) 소초 임원지 형을 애도하며 〔挽小草 林兄遠志〕 2수 82
39) 백하 양상형 어른을 애도하며 〔挽梁丈柏下 相衡〕 四絶一首, 七絶三首 83
40) 취우헌 오용선 형을 애도하며 〔輓翠友軒 吳丈龍善〕 84
41) 취은정 봉채규의 벽상운을 차운하다〔次醉隱亭 奉公采奎壁上韻〕 85
42) 양평 오공의 영정을 옮겨 안치한 운을 차운하여 드리다. 〔次呈襄平 吳公影幀移安韻〕 2수 86
43) 지재 송해사의 원운을 차운하다 〔次宋止齋 海士原韻〕 87
44) 귀락재 현편의 운으로 짓다 〔題歸樂齋板上韻〕 88
45) 임자년(1912년) 음력 섣달에 후석 오덕행과 불갑사에서 섣달 그믐날 밤을 지샐려고 하였다. 얼마 뒤에 종인들이 만류하여, 대명동 영사재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자, 달려가 편지를 보여주며 세 율시를 써서, 이어서 화답하여 드리다. 〔壬子臘月約與吳後石 德行, 將守歲于佛甲寺矣, 旣而爲其諸宗所挽, 期會于大明洞永思齋, 走簡且示三律, 因賡和以呈〕 3수 88
46) 영사재에서 섣달 그믐날 밤을 보내며 회포를 쓰다 〔永思齋除夜書懷〕 90
47) 다음날 대명동에 이르러 모여 이야기하다 〔翌日抵大明洞會話〕 91
48) 난와 오계수의 삼난의 운을 흉내 내어 화답하려고 한지가 이미 오래 된 것 같다. 그런데 뜻은 넘치지만 사(辭)가 줄어들어, 감히 경솔히 추한 면모를 드러내지 못하였는데, 마침 이때 3절을 보여 주었는데, 보내준 뜻이 진중하여, 거칠고 졸렬하지만 스스로 그만두거나, 끝내 성대한 은혜를 저버릴수 없어, 삼가 보운 하여 우러러 바치지만, 누추한 자질로 아름답게 꾸미는데 면치 못할까 두렵지만, 당돌하게 삼난의 운을 아울러 베낀 것에 발을 덧붙였다 〔吳難窩重涵三難韻擬和已久, 而意溢辭縮, 未敢率爾露醜, 適玆頫示三絶, 意寄珍重, 不可以蕪拙自沮, 終孤盛惠, 謹步仰呈, 恐不免刻畵, 唐突而三難韻傡寫添足〕 91
49) 주서 이청전과 유남 노유탁 두 현인이 수창한 운을 뒤늦게 차운하다 〔追次李靑田注書, 魯悠南 鍮鐸, 兩賢酬唱韻〕 93
50) 월담 운을 차운하다 〔次月潭韻〕 94
51) 취영정 원운을 차운하다 〔次取暎亭原韻〕 95
52) 송사 기우만을 애도하며 〔輓奇松沙〕 95
53) 귀머거리가 좋아서 〔喜聾〕 2수 96
54) 회헌정 시운을 차운하다 〔次晦軒亭韻〕 97
55) 충현각 단에서 제사 지낼 때 느낀 바가 있어 〔忠賢閣壇享時有感〕 98
56) 봉산정을 짓다 〔題鳳山亭〕 98
57) 화수정 시운 〔花樹亭韻〕 99
58) 나종환의 금사정 시운으로 짓다 〔題錦沙亭韻羅宗煥〕 100
59) 임철상의 금파정 시운으로 짓다 〔題錦坡亭韻林喆相〕 100
60) 금파정 시화 〔錦坡亭詩話〕 101
61) 봉강 안동섭의 생일잔치 시운을 차운하다 〔次安鳳岡 東燮晬宴韻〕 103
62) 의관 김응문의 회갑 시운 〔金議官應文回甲韻〕 104
63) 향양재 시운을 삼가 차운하다 〔敬次向陽齋韻〕 104
64) 금파정에서 호은 박훈양을 만나다 〔錦坡亭遇朴湖隱 薰陽〕 105
65) 앵두꽃과 복숭아꽃이 피어있는 아름다운 창가 〔玉窓櫻桃〕 106
66) 심사 신원여군의 회갑을 뒤늦게 축하하는 시운〔追賀心史 辛君元汝回甲韻〕 106
67) 봄을 보내며 〔餞春〕 2수 107
68) 시산(詩山)의 양로재 시운 〔詩山養老齋韻〕 108
69) 송은정 시운으로 지어 드리다 〔寄題松隱亭韻〕 110
70) 진사 김병규를 애도하는 시가 〔輓金進士秉圭〕 111
71) 박준관의 낙오정을 읊은 운 〔樂五亭韻朴準觀〕 111
72) 심종대의 남석재를 짓다 〔題南石齋 沈鍾大〕 112
73) 무장 송산의 송계정 시운을 차운하다〔次松溪亭韻茂長 松山〕 113
74) 연당 시운을 차운하다 〔次蓮堂韻〕 113
75) 임이정 시운을 차운하다 〔次臨覆亭韻〕 114
76) 사회정 중수 운에 차운하다 〔次四會亭重修韻〕 114
77) 성경수의 만취당 시운을 차운하다 〔次晩翠堂韻成卿修〕 115
78) 후석 오덕행을 애도하며 〔輓吳後石 德行〕 116
79) 여수군 삼황묘 건립 10주년 기념시 〔麗水郡 建廟十週年紀念詩〕 117
80) 충민사를 중건하는 운 〔忠愍祠重建韻〕 120
81) 매천 황현의 시집에 대하여 짓다 〔題梅泉 黃玹詩集〕 121
82) 비가 와 심심하고 지루하여 방옹의 시를 차운하다 〔雨中無聊次放翁韻〕 122
83) 매천집 운을 집어 들고 〔拈《梅泉集》韻〕 145
84) 산에 살면서 즉흥적으로 짓다. 〔山居卽事〕 146
85) 유생 허창문을 슬퍼하며 〔哀許生昌文〕 146
86) 앞 운을 써서 다시 매천집을 제하다 〔用前韻再題梅泉集〕 147
87) 산에 사는 친구를 방문하다 〔訪友人山居〕 147
88) 임만졸이 귀양이 풀려 돌아가는데 겨우 만나 송별하다 〔送任晩拙解謫歸覲〕 148
89) 입춘 날에 회포를 쓰다 〔立春日寫懷〕 148
90) 몽양재 정용구의 원운을 차운하다 〔次蒙養齋原韻鄭容求〕 149
91) 제오당의 벽상운에 지어 부치다 〔寄題霽梧堂壁上韻〕 149
92) 단군 〔檀君〕 150
93) 청천당 벽상운을 차운하다 〔次聽天堂壁上韻〕 151
94) 두봉 김병렴과 헤어지면서 드리다 〔贈別金斗峰秉濂〕 151
95) 금광 임규호를 뒤늦게 애도하며 〔追輓林錦狂 圭鎬〕 152
96) 양죽당 운을 차운하여 짓다 〔次題養竹堂韻〕 152
97) 의관 김종섭을 애도하며 〔輓金議官鍾燮〕 153
98) 벽오동 〔碧梧〕 154
99) 백일홍 〔百日紅〕 154
100) 사계화 〔四季花〕 154
101) 유씨 운호정을 시운을 추후에 차운하다 〔追次柳氏雲湖亭〕 155
102) 오극경의 야귀당 운을 차운하다 〔次夜歸堂韻吳克卿〕 155
103) 김씨의 노백당 운을 차운하다 〔次金氏 老柏堂韻〕 156
104) 도잠의 걸식 시를 읽고 느낀 바가 있어 짓다 〔讀陶靖節乞食詩有感而作〕 三首 156
105) 매화와 국화 〔梅菊〕 157
106) 학생 김희덕에게 보내다 〔贈金生 熙德〕 158
107) 우연히 짓다 〔偶題〕 158
108) 오병남을 축수하는 글을 모은 시첩 원운에 차운하다. 짧은 서문을 붙이다 〔次吳秉南壽帖原韻幷小序〕 159
109) 부질없이 읊다 〔謾吟〕 160
110) 부모상을 당한 이홍영이 협천에서 예전부터 하여온 사업을 하기 위해 돌아 가는데 송별하며 〔送別李棘人弘榮歸峽川舊業〕 161
111) 난와 오계수 처사를 애도하며 〔挽吳難窩處士繼洙〕 162
112) 불환정 판상운을 차운하다 〔次不換亭板上韻〕 2수 163
113) 석문에 모여 이야기하다 〔石門會話〕 164
114) 청전 이형이 마음을 곱게 하는 율시 한수를 지어, 나에게 정으로 보내어 보여주었는데, 말을 말 만드는데 나약한 사람이 뜻을 세우니, 졸렬함을 잊기에 충분하지만, 화답을 하였다. 〔靑田 李兄題心鮮一律, 示余遣情, 措辭, 足令立懦, 忘拙, 賡和.〕 164
115) 고사리를 뜯는 것을 읊다 〔採薇吟〕 165
116) 석문에서 동짓날 시운을 차운하다 〔次石門冬至韻〕 166
117) 수승대의 퇴계선생 시운을 차운하다 〔搜勝臺次退溪先生韻〕 166
118) 촉석루 판상운을 차운하다 〔次矗石樓板上韻〕 167
119) 진사 이명우를 애도하며 〔挽李進士明羽〕 168
120) 죽헌정을 중수하는 운 〔竹軒重修韻〕 169
121) 경신년(1920년) 늦은 가을에 박승언과 김영옥이 와서 배움을 잇고자 청하였으며, 윤남현도 또 도착하였는데, 마침 내가 찬 설사가 이질이 되어 침상의 요에 누워서, 그럭저럭 여러 달이 지났다. 여러 선비들의 힘을 입어 유폐됨을 면하면서, 홀로 완고하게 섭생의 길에 있었는데, 그러나 내가 면진하여 애를 쓰는 것에 효력이 없고, 이미 음력섣달이 장차 다하여, 세 소년이 돌아간다고 말하여, 한마디 말을 달라고 하는데 없는 것도 불가하기 때문에 3절을 지어 각자에게 보냈다. 다만 진청의 송별곡이 아니어서 한스러웠다 〔庚申晩秋, 朴勝彦, 金榮鈺來請學繼, 而尹南鉉又到, 適余冷泄成痢委臥床褥, 動經數朔. 賴諸彦免幽, 獨固有將攝之道, 然吾勉進之力無之, 旣而臘月將盡, 三少年言歸, 不可無一言相贈, 故搆三絶各贈, 但恨無以秦靑之曲送別.〕 170
122) 무송정 시운을 차운하다 〔次撫松亭韻〕 171
123) 수정재를 짓다 〔題守靜齋〕 172
124) 집성사의 여러 선비에게 운을 받들어 올리다 〔奉呈集成祠諸儒韻〕 173
125) 후헌 시운을 차운하다 〔次後軒韻〕 174
126) 삼우정 시운을 차운하다 〔次三友亭韻〕 174
127) 유성열의 벽계당 원운을 차운하다 〔次碧溪堂原韻柳星烈〕 175
128) 경진년(1940년) 섣달그믐날 밤 회포를 쓰다 〔庚辰除夜書懷〕 五七三絶 175
129) 신사년(1941년) 정월 생일 아침에 느낀 바가 있어 〔辛巳正月生朝有感〕 176
130) 정씨 영모재 시운을 차운하다 〔次丁氏永慕齋韻〕 177
131) 사문 이상호의 새 암자 벽상운을 차운하여 짓다 〔次題李斯文相瑚新菴壁上韻〕 177
132) 지난 일을 더듬어 생각하며 느끼는 회포 〔感懷〕 178
133) 유벽계 회갑 시운을 차운하다. 짧은 서문을 붙이다 〔次柳碧溪回甲韻, 幷小序〕 178
134) 불환정 시회 〔不換亭詩會〕 180
135) 음력정월 대보름날 밤 광곡에 머무르며 〔元夕留廣谷〕 180
136) 후계 차성구에게 보내다 〔贈車後溪 聖求〕 181
137) 갑인년(1914년) 섣달 그믐날 밤 후석 오형과 석문산 안에서 밤을 세우다 〔甲寅除夕與後石吳兄守歲于石門山中〕 181
138) 을묘년(1915년) 정월 초칠일 생일 아침에 느낀 바가 있어 〔乙卯正月初七日生朝有感〕 182
139) 해송당을 짓다 〔題海松堂〕 183
140) 중양절 후 7일에 서소정에 오르다 〔重陽後七日登舒嘯亭〕3수 183
141) 다음날 계사에 모여 마시다 〔翌日溪舍會飮〕 185
142) 석정에서 회포를 쓰다 〔石亭敍懷〕 186
143) 단성의 유학자 이장현 님의 시를 차운하여 수답하다 〔次酬丹城 李斯文章見甫〕 186
144) 교남 황성원 사문의 시를 차운하여 드리다 〔次贈嶠南 黃斯文聲遠甫〕 187
145) 죽곡 이인상 형 회갑 시운을 차운하다 〔次竹谷 李兄麟相回甲韻〕 187
146) 죽와 오형 회갑 시운을 차운하다 〔次竹窩 吳兄回甲韻〕 188
147) 송석 이규채 형 회갑 시운을 차운하다 〔次松石 李兄奎采回甲韻〕 189
148) 청전의 서자 운을 차운하다 〔次靑田捿字韻〕 189
149) 다시 휴자로 보운하다 〔更步休字韻〕 190
150) 연자방아의 다듬잇돌 〔硏子砧〕 190
151) 광산 김씨 김아에게 드리다 〔贈光山金雅〕 191
152) 서호를 바라보며 제월정에 오르다 〔觀西湖登霽月亭〕 192
153) 돌아가는 길에 불갑산에 오르다 〔歸路登佛甲〕 192
154) 통현에서 바다를 바라보다. 〔通峴望海〕 193
155) 해불암에 오르다 〔登海佛菴〕 193
156) 겨울 밤 〔冬夜〕 194
157) 봄날 속절없이 지어보다 〔春日謾成〕 194
158) 생일날 아침 느낀 바가 있다 〔生朝有感〕 195
159) 설날 아침 청어 홍어가 소반 위에 오른 것을 보고 희롱하며 짓다 〔元朝見紅魚靑魚登盤戱作〕 195
160) 솔숲이 보이는 창가에서 공연히 흥에 겨워 〔松窓謾興〕 195
161) 딱따구리 새 〔啄木鳥〕 197
162) 금강 유산록에 대해 짓다 〔題金岡遊山錄〕 197
163) 안개를 읊다 〔詠霧〕 199
164) 물건은 제각기 도리에 맞아야 한다 〔物各有宜〕 200
165) 제목 없음 〔無題〕 200
166) 친구 운양 기국빈을 추억하며 〔憶奇友雲陽國賓〕 200
167) 학생 계헌 허영규에게 드리는 시운 〔贈許生繼軒韻永奎〕 201
168) 여름 한창 때 이불을 둘둘 감고 읊조리다 〔仲夏之月擁衾口號〕 201
169) 설재선생의 유허비를 세우는 일에 병을 무릅쓰고 나아가 참석하지 못하고 애오라지 서툴게 베껴 만든 것을 보내다 〔雪齋先生遺墟立碑之役病未晉參聊寫拙搆以呈〕 202
170) 금강산의 만물상을 베끼다 〔金岡山萬物抄〕 202
171) 봄 날 〔春日〕 203
172) 느낀바가 있어 〔有感〕 203
173) 전설상의 네 가지 신령한 동물 용, 봉황, 기린, 거북 〔四靈〕 204
174) 늙은이의 한숨 〔老人嘆〕 204
175) 세상을 탄식하다 〔歎世〕 205
176) 국화를 읊다 〔詠菊〕 205
177) 박윤량 군과 헤어지며 보내다 〔贈別朴君潤亮〕 206
178) 병중에 고심하여 읊다 〔病中苦吟〕 206
179) 여름 날 〔夏日〕 206
180) 이어서 송은재 운을 보운하다 〔因步松隱齋韻〕 208
181) 우은 홍윤명 형을 애도하며 〔輓愚隱洪兄允明〕 208
182) 학산정 기둥에 써 붙인 글 〔鶴山亭柱聯〕 209
183) 월천재를 지어 부치다 〔寄題月泉齋〕 210
184) 병중에 신동욱에게 부치다 〔病中寄辛東旭〕 210
185) 임종할 때 입으로 읊다 〔臨終口呼〕 210
2. 권2서 〔卷之二/書〕 212
1) 민종열 목사께 올리다 〔上閔侯種烈〕 212
2) 면우 곽도에게 서간문을 올리다 〔上郭俛宇 도書〕 219
3) 송사 기우만에게 주다 〔與奇松沙〕 222
4) 최건재에게 답하다 〔答崔健齋〕 223
5) 오균선에게 답하다 〔答吳均善〕 225
6) 오덕행에게 답하다 〔答吳德行〕 227
7) 돈규 임문옥에게 답하다 〔答林敦圭 文玉〕 229
8) 정방규에게 답하다 〔答鄭枋珪〕 230
9) 오극경에게 답하다 〔答吳克卿〕 234
10) 정종섭에게 답하다 〔答鄭宗燮〕 237
11) 임혁규에게 답하다 〔答林爀圭〕 238
12) 기동설에게 답하다 〔答奇東卨〕 240
13) 안기준에게 답하다 〔答安基駿〕 241
14) 상중에 있는 오헌수를 위로하다 〔慰吳棘人 憲洙〕 242
15) 거상 중에 있는 임종현에게 답하다 〔答林喪人 鍾炫〕 244
16) 덕재 박형득에게 답하다 〔答朴德哉 炯得〕 247
17) 이태휴에게 답하다 〔答李泰休〕 256
18) 경열 정노수에게 답하다 〔答丁敬悅 魯壽〕 260
19) 사문 오유범에게 〔與吳斯文有範〕 263
20) 발산의 여러 선비들에게 주다 〔與鉢山諸彦〕 264
21) 곽단을 위로하다 〔慰郭澶〕 266
22) 봉정범에게 답하다 〔答奉正範〕 267
23) 김영호에게 주다 〔與金永濠〕 269
24) 김봉석에게 답하다 〔答金鳳錫〕 271
25) 김동후에게 답하다 〔答金東侯〕 271
26) 진사 김병규에게 주다 〔與金進士 秉奎〕 273
27) 원방 박병해에게 주다 〔與朴源方 炳海〕 274
28) 창선 박병우에게 답하다 〔答朴昌善 炳禹〕 275
29) 이찬신에게 답하다 〔答李讚信〕 276
3. 교남일기〔嶠南日記〕 / 권17 잡저 278
Abstract 316
부록 /보유편(補遺篇) 320
1. 송산사지(松山祠誌)에서 발췌 320
가) 이병수 선생 가장 〔李炳壽 先生家狀〕 320
나) 겸산 선생 행장 〔謙山 先生行狀〕 341
2. 난파유고(蘭坡遺稿)에서 발췌 357
가) 초토사가 보고한 군공을 별지에 쓰다 〔招討使報軍功別紙〕 357
나) 정장군의 토평일기 서문 〔鄭將軍討平日記序〕 361
다) 난파 정공의 유사 〔蘭坡鄭公遺事〕 363
첨부 : 매천집 제2권 시(詩) ○정유고(丁酉稿) 〈방옹의 운에 차하다〔次放翁韻〕〉 - 한국고전번역원에서 내려받음 367
참고문헌 379
본 연구는 구한말 호남, 특히 나주 지역의 마지막 유학자이며 한학자인 겸산 이병수(諫山 李퍼壽)의 문집인《겸산유고》를 역주(譯註) 한 것이다. 《겸산유고》에는 총 20권 10책의 방대한 작품이 수록되었으며, 특히 1894년경의 동학란 때 나주 읍성의 수성(守城)에 관한 관군(官軍)측의 활동상황을 기록한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은 이병수의 작품으로 2006년 12월 27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되어 《겸산유고》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겸산유고》를 대상으로 직접적인 연구 논문은 최현식의 <동학 농민군의 나주성(羅州城) 싸움과 《금성정의록》의 문헌적 고찰〉과 한영규의 <한말일제하 나주유림의 현실인식과 글쓰기〉뿐으로 거의 미비하다 할 수 있다.
이병수의 행장에 의하면, 5살 때 한문의 문리를 터득한 재주를 아버지가 발견하고, 6살 때 종숙부 이준구(李俊九)의 문하에 보내어 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 후 20살 때까지 종숙부에게서 배우고 그 다음부터는 독학으로 학문을 깨우쳤다. 30살 즈음에는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로 경서를 터득하고 암송하였다. 이병수는 과거시험에 나아갈 생각이 있었으나, 구한말경의 어지러운 세상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893년 민종열 나주목사(羅州牧使)가 새로 부임하면서 나주의 유교 풍습을 교화 하고자 향약(鄕約)의 규약을 결성하고, 각 리와 각 면 그리고 나주목에 이르기까지 향약의 계 조직을 하도록 분위기가 조성될 때, 이병수는 나주목사의 초청으로 도약소(都約所)의 직월(直月)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직월은 향약의 여러 일을 맡아보던 직책의 하나로, 오늘날의 간사(幹事)와 같다.
1894년 때에 동학군이 나주읍성을 침공해 오자 민종열 나주목사는 이병수를 측근 에 두고 주로 문장(文章)의 역할을 하도록 하여 마침내 《금성정의록》이 탄생된 것이다.
1910년 한일병탄 이후에 암울한 시기에는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제자들이 힘을 모아 송산정사(松山精舍)를 짓고, 이병수가 만년에 학문을 강의하는 장소로 활용토록 하였으며, 1945년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겸산유고》는 그가 죽은 5년 후인 1946년도에 그의 제자 이민선, 김기우, 정우석, 김기석 등에 의해 10책 20권, 석인본으로 간행되었다.
시는 제목으로 보면 185개 작품으로 총 281수가 수록되었는데, 7언 고체시 1수, 5언 절구 21수, 5언 율시 8수, 7언 절구 71수, 7언 율시 180수이다. 서간문이 29편, 문집의 서문(序文)이 51편, 기사문(記事文)이 142편, 집을 지은 상량문(上樑文)이 47편, 신에게 고하는 축문(祝文) 7편, 죽은 이의 제문(祭文) 9편,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시는 봉안문(奉安文) 5편,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기우제문(祈雨祭文) 6편, 비문(碑文)이 200편, 사람이 죽은 뒤에 그 사람의 평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인 행장(行狀) 86편, 문집의 뒤 말미에 쓰는 글인 발문(城文) 48편, 기타 전문(傳文) 47편 등 방대하다. 특히 제10책의 〈금성정의록〉 갑편, 을편, 병편은 구한말 당시의 나주지역 역사를 연구하는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겸산의 사상과 지향점은 그가 남긴 시와 서간문 등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그는 사상적으로 노사 기정진과 그 문인들의 주리철학(主理哲學)을 계승하였다. 그는 노사의 손자인 송사 기우만이나 노사의 문인 난와 오계수, 후석 오준선 등과 자주 왕래하며 노사의 주리철학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이 때문에 영남의 학자 중에서도 주리설을 주장하며 노사학맥과 교분이 두터웠던 면우 곽종석을 흠모하였다.
둘째, 그의 일생은 국가의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1895년 명성왕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는 등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이에 저항하여 나주 지역에서 의병운동을 일으키는 등 그는 끝끝내 일제의 침략을 묵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그는 대부분의 노사 기정진의 문인들과 마찬가지로 위정척사 사상을 견지하였다. 그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나주목사 민종렬을 도와 동학군에 맞서 결사 항전 하였으며, 단발령에 반대하였고, 신학문도 배척하였다.
넷째, 그는 일제 강점기에도 일체에 타협하지 않는 강인한 민족정신을 견지하였다. 그가 지은 시 총281수중에 약 10%인 30여수가 우국시이다. 겸산은 직접 칼은 든 무인이 아닌 붓을 든 문인으로서 반일의 사상적 면모가 보인다.
다섯째, 겸산은 어려서부터 유학을 통해 학문을 닦았고, 나주향교에서 교임(校任)을 맡아 유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런데 시에서 보면 자주 절에 가서 스님과 같이 자거나 교유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겸산은 유학의 대가이면서 학문의 다원적 발전을 위해 불교를 멀리 하지 않은 성향이 엿보인다.
한편, 시·서·일기를 제외한 작품은 모두 겸산에게 글을 청탁하여 지었으며, 그 작품이 무려 7책에 가깝다는 것은 그 당시 이병수의 인품과 문장력이 세상에 알려 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모든 작품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역사 현장에 있었던 인물들과의 교류 결과에 나온 작품이기에, 역주를 통해 역사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전화번호 | ※ '-' 없이 휴대폰번호를 입력하세요 |
---|
기사명 | 저자명 | 페이지 | 원문 | 기사목차 |
---|
번호 | 발행일자 | 권호명 | 제본정보 | 자료실 | 원문 | 신청 페이지 |
---|
도서위치안내: / 서가번호:
우편복사 목록담기를 완료하였습니다.
*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저장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