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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국문초록
목차
I. 서론 11
1.1. 연구 목적과 의의 11
1.2. 선행연구 검토 13
1.3. 연구범주와 방법 19
II. 1910-20년대 몽골 정세 22
2.1. 1911·1921년 혁명과 자주독립 지향 22
2.1.1. 1911년 복드 칸정부와 내외몽골 통합운동 22
2.1.2. 몽·러협정과 몽·장(藏)조약 26
2.1.3. 캬흐타 3국 협정과 외몽골자치 철회 29
2.1.4. 1921년 인민정부와 공화제 수립 31
2.2. 내·외몽골 분리와 주변 열강의 간섭 34
2.2.1. 제1-3차 러․일협약 34
2.2.2. 1913년 중·러성명 37
2.2.3. 1915년 남만주·동부내몽골에 관한 조약 40
2.2.4. 1924년 중·소(蘇)협정 42
III. 한몽 교류 관련 기록과 자료 45
3.1. 몽골행 한인 기록 46
3.1.1. 김규식의 생애와 기록 46
3.1.2. 여운형의 생애와 기록 51
3.1.3. 계봉우의 생애와 기록 56
3.1.4. 장건상의 생애와 기록 59
3.1.5. 박영철의 생애와 기록 63
3.1.6. 이진호의 생애와 기록 69
3.2. 몽골·일본 소재 공문서 76
IV. 몽골행 한인들의 유형과 성격 80
4.1. 한국 독립운동기지 건설 추진 81
4.2. 한인 사회주의자들의 왕래 93
4.3. 친일세력의 만몽(滿蒙)침투 99
V. 한·몽인(韓·蒙人)의 연대와 교류 105
5.1. 동아시아 혁명운동과 한몽 연대 105
5.1.1. 운게른 내전 105
5.1.2. 중·한·몽·일 동아시아 혁명운동 109
5.1.3. 극동민족대회와 한·몽 대표자 동행 113
5.1.4. 한·몽 정치 인사 접촉 117
5.2. 근대 자본주의 도입과 경제교류 130
5.2.1. 상업 130
5.2.2. 광업 133
5.2.3. 농업 135
5.3. 문호개방과 문화교류 138
5.3.1. 교통 138
5.3.2. 종교 148
5.3.3. 의료 155
VI. 결론 163
참고문헌 168
부록 182
Abstract 204
Товчлол 208
〈표 1〉 「중앙」에 실린 「나의 回想記 1-5편」 목차 55
〈표 2〉 박영철의 만몽시찰단 일정 66
〈표 3〉 이진호의 「滿蒙の旅」 목차 74
〈그림 1〉 20세기 초 내·외몽골 지도 10
〈그림 2〉 「민립보」에 실린 몽골정벌 문제 (1912.9.4) 38
〈그림 3〉 장가구에서 찍은 김규식 사진 51
〈그림 4〉 「중앙」 3월호 표지와 「나의 回想記 旅行篇」 중 일부 54
〈그림 5〉 박영철의 「亞洲紀行 」표지와 첨부된 「亞洲紀行畧圖」 지도 65
〈그림 6〉 「매일신보에」 실린 '만몽시찰단' 사진 (1922.6.2) 67
〈그림 7〉 이진호의 「滿蒙の旅」 표지와 첨부된 「鮮滿交通圖」 지도 71
〈그림 8〉 이진호의 만몽시찰 경로 75
〈그림 9〉 「매일신보」에 실린 '남북만주시찰단'과 '만몽시찰단' 모집 광고 103
〈그림 10〉 1921년 몽골의 혁명 인사들 사진 123
〈그림 11〉 언더르 친왕 얀산자브 생전 모습 129
〈그림 12〉 The Mongolian Trading Company의 콜맨 사장과 자동차 142
〈그림 13〉 몽골경유노선과 만주경유노선 경로 144
〈그림 14〉 만주지역 철도노선과 사조선(四洮線) 147
〈그림 15〉 「몽고교회 사경회」, 「기독신보」(1927.3.3)(이미지참조)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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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몽 교류는 역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정세변화 속에서 지속과 단절을 반복해왔다. 20세기 초 신해혁명을 계기로 동북아시아는 전통적 중화질서가 해체되고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해 새로운 국제질서로 재편되었다. 중국에 이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위기에 직면했던 중국 주변의 한국, 몽골, 티베트, 신장 등의 약소민족들은 자국의 독립을 위해 강대국뿐만 아니라 약소민족 간의 연대와 교류를 강구해 나갔다. 이처럼 민족해방과 자주독립 수립이라는 역사적 관계 속에서 20세기 초 한몽 교류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990년 체제전환 이후 몽골 문서보관소에 소장된 20세기 초 한국 관련 문서가 발굴되면서 몽골지역에서 전개된 한국독립운동이 국내에서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 계기로 20세기 초 한몽 교류의 단면이 밝혀질 수 있었지만 이후 국내의 자료 발굴조사와 한국독립운동 외에 다양한 활동 영역으로 확장되지 못한 채 한몽 교류연구는 답보의 상황에 있었다.
그리하여 본 연구에서는 1차 작업으로 그동안 진행되지 않았던 국내의 자료를 발굴·수집하여 「1910-20년대 몽골행 한인 명단」과 「1910-20년대 재몽골 한인 현황」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 결과 총 77명의 몽골행 한인 명단과 실명을 알 수 없는 몽골행 한인으로 외몽골에 약 50~100명, 내몽골에 약 1,500명이 이주 또는 체류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반면 한국행 몽골인은 1926년 12월 9일 자 『 동아일보』 기사에서 확인된 평양 탄광에서 근무한 몽골인이 유일했다.
따라서 본 연구는 1차 자료 결과를 토대로 당시 몽골 정세와 몽골행 한인들의 기록·유형·활동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20세기 초 한몽 교류의 양상과 그 의미를 고찰하였다. 이에 대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20세기 초 한몽 교류를 통해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중성과 약소민족의 정치적 한계성을 살필 수 있었다. 한국은 1910년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구하기 위해 중국과 러시아와의 연대와 지원을 모색했지만, 사실상 중국과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를 놓고 첨예한 대립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몽골은 1911년 독립선언과 함께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과의 외교교섭을 추진하기도 했다. 결국 일본과 러시아는 1907·10·12년 제1-3차 러일협약과 1915년 만몽조약을 통해 한국과 외몽골을 자신들의 세력권 아래로 놓을 수 있었다.
셋째, 20세기 초 한몽 교류는 정치적 연대보다는 경제·문화 영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나타냈다. 몽골은 러시아와 중국으로 이주·망명해 있던 한인들에게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생계를 마련하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되었다. 당시 일제의 탄압과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몽골지역으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힌 한인들은 무역, 광산, 의료, 종교, 수전(水田) 등의 다양한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몽골의 개혁·개방과 근대사회로의 이행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넷째, 20세기 초 한몽 교류에서 몽골 측의 지원과 우호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시 몽골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한몽 교류에서 몽골정부와 몽골인들의 부정적 인식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복드 칸의 이태준 훈장 수여, 몽골 경유 한인들에 대한 몽골정부의 입국·통행 허가, 극동민족대회의 한몽 대표단 동행, 몽골정부의 한인관료 채용, 생활고에 시달리는 러시아 이주한인 지원, 내몽골지역의 한인이주와 수전사업 등을 통해 몽골행 한인에 대한 몽골 측의 우호적인 입장과 지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 그동안 진행되지 않았던 몽골행 한인의 기록을 발굴·검토하여 다양한 영역에서 전개된 한몽 교류의 양상과 그 의미를 도출하였다. 몽골행 한인들의 몽골기록과 무역, 광산, 의료, 종교, 수전 등의 한몽 교류활동은 사회주의 정권 이전 복드 칸정권의 개방화와 근대화 문제를 이해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아울러 20세기 초 한몽 교류의 역사적 경험은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한몽 관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원문구축 및 2018년 이후 자료는 524호에서 직접 열람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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