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호기사보기
기사명 | 저자명 | 페이지 | 원문 | 기사목차 |
---|
대표형(전거형, Authority) | 생물정보 | 이형(異形, Variant) | 소속 | 직위 | 직업 | 활동분야 | 주기 | 서지 | |
---|---|---|---|---|---|---|---|---|---|
연구/단체명을 입력해주세요. |
|
|
|
|
|
* 주제를 선택하시면 검색 상세로 이동합니다.
표제지
국문초록
목차
I. 서론 9
II. 숙종대 궁중회화와 〈제갈무후도〉 14
1. 〈제갈무후도〉의 양식과 초상화적 특징 14
2. 〈제갈무후도〉에 쓴 숙종의 어제 분석 21
3. 숙종의 서화 감상과 제작 경향 29
III. 제갈량 초상화와 은거 도상 38
1. 제갈량 초상화의 전통 38
2. 소상 형식의 적용과 은거의 함의 49
IV. 명군으로의 표상과 충의 촉구 60
1. 와룡사와 〈제갈무후도〉 60
2. 노론의 제갈량 초상화 활용과 〈제갈무후도〉 74
V. 결론 85
참고문헌 90
도판 106
Abstract 119
도 1. 〈제갈무후도(諸葛 武侯圖)〉, 1695년, 견본채색, 164.2x99.4cm, 국립중앙박물관 106
도 2. 〈진단타려도(陳摶 墮驢圖)〉, 1715년, 견본채색, 110.9x69.1cm, 국립중앙박물관 106
도 3. 도 1의 세부(제갈량의 상체 부분) 106
도 4. 王圻·王思義, 〈諸葛孔明像〉, 『三才圖會』 卷27, 1609년 106
도 5. 윤두서(尹斗緖), 〈맹자(孟子)와 송유(宋儒)〉, 《십이성현화상첩 (十二聖賢畵像帖)》, 1706년, 견본수묵, 43x31.2cm, 국립중앙박물관 107
도 6. 王圻·王思義, 〈成祖文皇帝像〉, 『三才圖會』 卷 23, 1609년 107
도 7. 王圻·王思義, 〈諸葛巾〉, 『三才圖會』 卷62, 1609년 107
도 8. 朱天然 刊, 『歷代古人像贊』, 1498년, 中國國家圖書館 107
도 9. 益王 命編, 『古先君臣圖鑑』 (淸代本), 1584년, Harvard-Yenc hing Library 107
도 10. 中宗 命編, 『역대군신도상(歷代君臣圖像)』, 1526년, 국사편찬위원회 마이크로필름 (경주손씨 서백당 소장) 107
도 11. 〈신임초상 (申銋肖像)〉, 1719년, 견본채색, 151.5x 78.2cm 국립중앙박물관 108
도 12. 〈장만초상(張 晩肖像)〉 (야복본), 견본채색, 187x110cm, 경기도박물관 108
도 13. 도 1의 세부(신발 부분) 108
도 14. 〈김만증초상 (金萬增肖像)〉, 18세기 초, 견본채색, 173.4x89.2cm, 광산김씨 돈촌후손가 108
도 15. 《숙종신미친정계병(肅宗辛未親政契屛)》, 제2-7폭(전체 팔곡병풍), 1691년, 견본채색, 각 145.0x60.0cm, 한국국학진흥원 109
도 16. 傳 진재해 (奏再奚), 〈잠직도(蠶織圖)〉, 1697년, 견본채색, 137.6x52.4cm, 국립중앙박물관 109
도 17. 傳 이징(李澄, 1581-1674 이후), 〈산수도(山水圖)〉, 견본채색, 128.8x 69.1cm, 국립중앙박물관 109
도 18. 도 17의 세부 109
도 19. 도 16의 세부 109
도 20. 도 2의 세부 110
도 21. 《사현파진백만병도(謝玄破秦百萬兵圖)》, 팔곡병풍, 1715년, 견본채색, 170x418.6cm, 국립중앙박물관 110
도 22. 도 21의 세부 110
도 23. 도 1의 세부(소나무 부분) 110
도 24. 장득만(張得萬), 《고사인물화보(故事人物畫 譜)》중 利 11면, 18세기 전반, 지본채색, 47.2x36.2cm, 국립중앙박물관 110
도 25. 도 21의 세부 110
도 26. 元人(前傳 趙孟 頫), 〈諸葛亮像〉, 지본 채색, 61.2cmx45.6cm, 北京 故宮博物院 111
도 27. 〈공명초상 (孔明肖像)〉, 조선 후기, 견본채색, 127.3x50.9cm, 국립중앙박물관 111
도 28. 〈漢諸葛亮立 像軸〉(南薰殿本), 견본채색, 192x95.6cm, 中國國家博物館 111
도 29. 明人(前傳 宋 李迪), 〈三顧圖〉, 견본채색, 82.5x175.7cm, 臺北 國立故宮博物院 111
도 30. 傳 仇英(약 1494-1552), 〈白描 諸葛武侯像〉, 《元明書翰第九冊》, 지본수묵, 28.3x36.2cm, 臺北 國立故宮博 物院 112
도 31. 張風, 〈畵諸 葛亮像〉, 1654년, 지본수묵, 126.4x59cm, 臺北 國立故宮博物院 112
도 32. 張風, 〈諸葛亮圖〉, 17세기, 지본수묵, 106.8x44.7cm, 東京國立博物館 112
도 33. 〈蜀漢丞相忠 武侯諸葛亮〉, 《歷代聖賢名人像》(南薰 殿本), 지본채색, 약 46x33.3cm 112
도 34. 〈諸葛亮像〉, 《歷代聖賢半身像》 (南薰殿本), 견본채색, 42.6x34.6cm, 臺北 國 立故宮博物院 112
도 35. 曾鯨, 〈胡爾慥 肖像〉, 1627년, 견본채색, 160x80cm, 浙江省 德淸縣博物館 113
도 36. 胡炳, 〈송하 한 유 도 (松 下 閒 遊 圖)〉, 1637년, 견본채색, 175x98.5cm, 실학박물관 113
도 37. 진재해, 〈학암무송상(鶴巖撫松 像)〉, 1728년, 견본채색, 121.1x61cm, 개인 소장 113
도 38. 戴進(1388-1462), 〈三 顧草廬圖〉, 견본수묵담채, 172.2x107cm, 北京 故宮博物 院 114
도 39. 〈三顧草廬〉, 『新全相三國志平話』, 至治年間(1321-1323), 日本 國立公文書館 114
도 40. 傳 馬興祖, 〈孔明草 廬圖〉(雙幅之一), 15-16세기, 견본담채, 약 124x63cm [川崎芳太郎 編, 『長春閣鑑賞』 第4集(國華社, 1914), 第 49] 114
도 41. 〈靑花白磁三顧草廬文大 罐〉, 元代, 높이 27.6cm, Pegasus Trust 115
도 42. 도 41의 뒷면 115
도 43. 〈靑花白磁三顧草廬文梅甁〉, 元代, 높이 38.6cm, Museum of Fine Arts, Boston 115
도 44. 謝時臣, 〈諸葛 亮像〉, 1560년, 지본채색, 292x100.4cm, 北京 故宮博物院 115
도 45. 정선(鄭敾, 1676-1759), 〈초당춘수도(草堂春睡圖)〉, 견본채색, 28.7x21.5cm, 왜관수도원 116
도 46. 정선, 〈남양포슬도(南陽抱膝圖)〉, 견본채색, 34x24cm, 개인소장 116
도 47. 〈영유현지도(永柔縣地圖)〉 (일부), 1872년, 규장각(奎10575) 116
도 48. 戴進, 〈渭濱垂釣圖〉, 15세기, 견본수묵담채, 139.6x75.4cm, 臺北 國立故宮博物院 117
도 49. 戴進, 〈箕山高隱 圖〉, 15세기, 견본수묵담채, 138.2 x 75.2 cm, The Cleveland Museum of Art 117
도 50. 朱瞻基(明宣宗), 〈武侯高臥圖〉, 1428년, 지본수묵, 27.7x40.5cm, 北京 故宮博物院 117
도 51. 김진규(金鎭圭), 〈송시열초상 (宋時烈肖像)〉 (草本), 1680년, 지본수묵, 56.5x36.5cm, 국립청주박물관 기탁 118
도 52. 김창업(金昌業) 초, 전 진재해 필, 〈송시열초상(宋時烈肖像)〉, 18세기 초, 견본채색, 92.5x62.0cm, 제천의병전시관... 118
도 53. 김수증(金壽增), 〈김시습초상(金時習肖像)〉, 17세기 중반, 지본담채, 56x44cm, 개인 소장 118
도 54. 〈김시습초상 金時習肖像)〉 (無量寺本), 17-18세기경, 견본채색, 71.8x48.1cm, 불교중앙박물관 118
본 논문은 숙종(肅宗, 재위 1674-1720)의 어제(御製)가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제갈무후도(諸葛武侯圖)>의 시각적 특징을 구체적인 정치 상황에서 해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갈무후도>는 촉한(蜀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제갈량(諸葛亮, 181-234)이 수하인물(樹下人物) 형식으로 그려진 초상화(肖像畵)이다. 이 그림은 1695년 5월 상순에 제작되었으며, 숙종대 궁중회화의 양식적 특징인 공필채색(工筆彩色)과 청록산수(靑綠山水) 화풍으로 그려졌다. 제갈량의 안면부에는 『삼재도회(三才圖會)』에 실린 <제갈공명상(諸葛孔明像)>이 충실히 모사되어 있다. 복식 묘사에는 동시기 조선의 초상화가 참고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동(侍童)이 높은 신분의 사치품인 운혜(雲鞋)를 착용한 모습으로 묘사된 것은 제갈량의 위상을 더욱 드높이기 위한 시각적 장치로 생각된다. 화면의 우측 상단에 쓰인 어제에서 숙종은 제갈량을 경모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제작했다고 밝혔다. 숙종은 군신공치(君臣共治)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뛰어난 왕좌(王佐)라는 측면에서 제갈량을 경모한 것으로 추정된다.
숙종은 자신의 회화 제작과 감상이 완물상지(玩物喪志)가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실제로 현존하는 숙종이 주문·제작했던 작품들과 그 관련 기록들은 그가 회화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데 능숙했던 국왕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숙종은 사대부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림들과 중국의 서화(書畫)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구해 감상하며 회화적 지식을 축적하였다. 이러한 회화적 지식을 기반으로 숙종은 도화서(圖畫署) 화원(畫員)들에게 그림의 제작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회화에 구체적인 정치적 함의를 담고자 하였다. 정치적 메시지를 분명히 전하기 위해 숙종은 그림의 시각적 효과와 어제를 활용하였다.
숙종이 그림의 시각적 효과를 중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초상화로서 <제갈무후도>에 산수 공간이 적용된 것은 제갈량의 특정한 면모를 강조하기 위한 선택일 가능성이 있다. 제갈량 초상화는 제작 및 감상자에 따라 다양한 맥락에서 그려졌다. 현존하는 작품들에서 제갈량은 지물(持物), 복식, 자세 등의 시각적 요소를 통해 공신(功臣), 신선(神仙), 은자(隱者)로 형용되었다. 그러나 수하인물식으로 그가 그려진 초상화는 일반적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무후도>의 수하인물식 산수 구성은 명말(明末)부터 중국에서 유행한 초상화 형식인 소상(小像)이 차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상에서 산수 배경은 대체로 대상 인물의 은거(隱居) 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보경(補景)을 의미한다. 조선에서는 김육(金堉, 1580-1658)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호병(胡炳)에게 주문한 <송하한유도(松下閒遊圖)>가 전해진다. 아울러 조문명(趙文命, 1680-1732)은 김육의 소상과 유사한 형식의 초상화인 <학암무송상(鶴巖撫松像)>을 진재해(奏再奚, ?-1733 혹은 1734)에게 주문하였다. 두 초상화는 대상 인물의 은일(隱逸) 지향을 드러내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제갈무후도>는 두 그림의 전체 구성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소상 형식이 차용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소상 형식에 적용된 제갈량의 모습은 융중(隆中)에서 은거하던 시절을 연상시켰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수하인물식으로 그려진 특수한 유형의 삼고초려도(三顧草廬圖)는 <제갈무후도>와 상당히 흡사해 주목된다. 숙종은 몇 점의 삼고초려도를 감상하고 남긴 제화시(題畫詩)에서 봄의 계절감을 거듭 강조하였다. 필자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제갈량의 융중 은거를 연상시키는 청록산수 배경이 군신(君臣)의 상서로운 만남을 예시하는 시공간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문헌 자료를 검토한 결과, <제갈무후도>는 악비(岳飛, 1103-1142)의 와룡사(臥龍祠) 합향(合享)을 기념해 제작된 그림으로 추정된다. 와룡사는 평안도(平安道) 영유현(永柔縣)에 소재한 제갈량의 묘우(廟宇)이다. 와룡사는 선조(先祖, 재위 1567-1608)가 조성한 이후 숙종에 의해 국가적 차원에서 재조명되었다. 숙종은 1686년과 1695년 두 차례에 걸쳐 와룡사에 주목하면서 평안도 지역을 충의(忠義)로 교화하는 한편, 1695년에 외방별시(外方別試)를 열어 변방의 지역민을 등용하는 은택을 베풀었다. 이와 관련하여 명대(明代) 전기에 은일자를 등용하는 것이 중시되었던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은거를 주제로 한 그림이 황제를 명군(明君)으로 선전하는 데 활용되었던 것은 <제갈무후도>를 해석하는데 시사점을 제공한다. 명 선종(宣宗[선덕제(宣德帝)], 재위 1425-1435)은 은거하는 제갈량의 모습을 직접 그려 공신 진선(陳瑄, 1365-1433)에게 하사함으로써 그의 치적을 표창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선종은 이를 통해 공신의 재능을 알아보고 등용한 자신을 명군으로 선전하고자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갈무후도>는 비교적 큰 크기의 축(軸)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아울러 기록에 따르면 1695년경 악비의 초상화가 제작되어 궁에 걸려 있었다. 숙종은 신하들과 함께 악비의 초상화를 감상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들은 <제갈무후도> 또한 궁의 공적인 공간에 걸려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숙종의 주문작은 대부분 축과 병풍(屛風) 형식이다. 숙종이 이러한 형식의 그림을 펼쳐둔 곳은 "어좌(御座) 옆"인 경우가 많았다. 숙종이 어좌 옆에 그림을 펼쳐두었던 것은 감상자인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이 있다. <제갈무후도>의 군신의 만남이 예시된 시공간에서 제갈량은 유비(劉備)의 방문을 기다리는 듯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이를 감상하는 숙종은 마치 그를 방문한 유비처럼 보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따라서 필자는 '변방'에서 인재를 등용한 숙종이 <제갈무후도>를 통해 유비와 같은 명군으로 표상되었다고 해석하고자 한다.
한편 17세기 후반 노론(老論)은 주희(朱熹, 1130-1200)를 계승하고 모방하는 차원에서 제갈량 초상화를 걸어두고 감상하는 문화를 형성하였다. 노론은 제갈량의 초상화를 도통(道統)의 계보를 세우는 일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노론은 대립하는 붕당(朋黨)의 영수(領袖)를 공격할 때 제갈량을 공공연하게 이용하였다. <제갈무후도>가 제작된 1695년 5월은 숙종이 갑술환국(甲戌換局) 이후 탕평(蕩平)을 시도하며 반탕평론적 태도를 견지하는 노론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던 시기였다. 이에 필자는 노론이 제갈량 초상화를 도통의 측면에서 감상하는 분위기 속에서 <제갈무후도>가 제갈량의 왕좌, 즉 왕을 측근에서 보좌하는 근신(近臣)으로서의 면모를 환기시켰을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결국 <제갈무후도>는 숙종을 명군으로 선전하면서 신하들에게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실현을 위해 편당(偏黨)을 중단하고 제갈량과 같은 신하가 되기를 촉구하는 그림으로 해석될 수 있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전화번호 | ※ '-' 없이 휴대폰번호를 입력하세요 |
---|
기사명 | 저자명 | 페이지 | 원문 | 기사목차 |
---|
번호 | 발행일자 | 권호명 | 제본정보 | 자료실 | 원문 | 신청 페이지 |
---|
도서위치안내: / 서가번호:
우편복사 목록담기를 완료하였습니다.
*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저장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