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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국문초록
목차
제1장 서론 11
제2장 당 후기 번진 체제와 당의 대응 14
제1절 동남번진을 통한 재원의 확보 14
제2절 하삭(河朔) 번진의 할거양상과 당조의 대응 22
제3장 산동의 지정학적 특질과 이정기(李正己) 가문의 경제활동 31
제4장 산동 지역 신라인의 활동과 장보고의 등장 40
제5장 결론 52
참고문헌 54
中文提要 58
[그림 1] 당 후기 번진 및 상공 지역 구획 16
[그림 2] 수(隋), 당(唐)대 대운하 노선도 19
[그림 3] 산동반도와 신라 간의 해로 노선도 32
[그림 4] 엔닌 일행의 초주와 양주 간의 왕래노선도 43
장보고를 언급할 때 가장 주목받는 것은 그가 주도한 당·나·일 3국 간의 해상무역 활동이다. 장보고의 등장 이후 3국 간의 무역 활동은 원래 국가가 주도하던 조공(책봉) 무역에서 '합법적' 민간무역으로 전환되었다. 그렇다면 장보고는 어떻게 3국 간의 해상무역을 전개할 수 있었을까? 그의 무역 활동을 시작된 계기는 무엇일까?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우선 당시 장보고의 주요 활동지였던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한 당조의 상황이나 정세에 대해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의 당조는 안사의 난을 겪었던 후에 정치적·군사적·경제적인 피해를 복구하지 못하고 지방에 대한 지배력도 약해지는 상황이었다. 반면 지방 번진 절도사는 번진 내의 행정·재정·군사 삼권일치(三權一致)를 이루었고, 점차 당조 중앙의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일부 번진들은 연합하여 당조 중앙과 대항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들은 이른바 '할거 번진'으로, 그 중 대표적인 번진은 산동 지방에 위치하는 치청(淄靑)번진이며, 당시 세력이 가장 강한 번진이었다. 그러나 당조 중앙의 통치에 순응하며 중앙과 맞서지 않는 번진도 있었다. 이처럼 순응한 번진은 그 역할과 기능에 따라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당조 재정의 주요 수입지인 동남지방의 번진으로, 당조 중앙은 정치적·군사적·경제적으로 여러 정책을 시행하여 이 지역을 확고히 장악하였다. 중원지방의 번진은 동남지역의 조량(漕糧)을 빠르게 장안으로 운송하고, 또 반란을 견제하는 역할로 주목되었다. 당조는 동남지방의 번진과 중원지방의 번진을 장악함으로써 중앙기구를 정상화 가동할 수 있는 재원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장안의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즉 당조 변방의 안전 문제였다. 당조는 변방 이민족의 빈번한 침입 때문에 이곳에 많은 병력을 배치하여 번진을 설치하였고 변방의 안전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변방에서 이렇게 많은 병력을 보유하는 것은 장안에 대해서도 위협이 되었다. 이 때문에 변방의 형세는 항상 당조 중앙에게 중시되었다.
안사의 난 이후로 중앙의 지배력이 약해졌던 배경 하에 당조는 우선 동남 번진을 이용하여 재정수입을 확보하고, 그 외 여력(餘力)으로 변방의 안전을 지킴으로써 장안의 정치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때문에 동북 지역에 있는 할거 번진에 대해서는 해결할 여력이 없었다. 당조는 동북 할거번진들의 요구를 최대한 충족시켜 더 이상 중앙 정부에 저항하지 않도록 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번진과의 불필요한 전쟁은 피하고, 중앙의 지배력이 더 약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당조 중앙의 타협과 용납하는 태도로 인해 당시 산동지역을 지배하였던 이정기 가문은 산동반도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발해, 신라와 무역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정기 가문은 막대한 이익을 얻었고 당조 중앙과 계속 할거 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씨 가문의 좋은 상황은 오래 가지 못하였고, 819년에 당조에 소멸되었다. 이후 치청번진은 중앙으로 귀순하여 더 이상 지방정부 명의로 국제 무역을 전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당조의 중심재원지인 강회(江淮)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 당조는 상대적으로 치청번진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산동 경내(境內)에서는 이미 '관행'이 된 해외 무역 시장에 새로운 '후계자'가 필요하였다. 이때 당 목종(穆宗)의 병력 감소 정책으로 무녕군(武寧軍)을 떠난 장보고는 치청번진 지방정부의 은밀한 지원 아래 산동 경내의 신라인을 연합하여 등주(登州)의 적산법화원을 기지로 삼아 자신을 중심으로 한 당·나·일 3국 간의 무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장보고는 당조 중앙의 재원지인 동남지방에 대한 중시, 당조 변경 정세의 견제, 당조 중앙이 산동지역에 대해 상대적으로 중시하지 않는 배경 하에서 치청진 지방정부와 결합하여 당·나·일 3국 간의 해상무역을 전개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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