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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지 2

목차 5

국문초록 6

Ⅰ. 머리말 8

Ⅱ. 정신의 '합리화': 일제 식민지기 배성룡의 지적 행보 13

1. 사상운동의 강조 13

2.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의 탈락 20

Ⅲ. 제도의 '합리화': 1950년대 배성룡의 지적 행보 30

1. 사상과 제도의 착종 30

2. 동양적 후진성 비판: 제도의 부재 37

Ⅳ. 이념의 '합리화': 1950년대 배성룡의 베버 수용과 전유 43

1. 배성룡의 베버 이해: 법률합리화 43

2. 배성룡의 베버 이해: '도의'의 재구성 49

Ⅴ. 맺음말 56

참고문헌 60

Abstract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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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배성룡의 지적 행보를 통해 그간의 사상사와 지식인 연구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배성룡은 일제 식민지기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 '화요파'의 이론가로, 해방공간에서는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투신한 중도파 정치인으로, 1950년대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옹호하는 '『思想界』 지식인'으로 활동했다. 다만 그는 이처럼 오랜 기간 정치운동에 투신하고 언론·저술 활동에 종사하면서도 뚜렷한 학문적 업적을 남기거나 인상적인 정치적 성과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이를 반영하듯 배성룡을 다룬 선행연구는 그리 많지 않으며, 그나마도 일제 식민지기, 해방공간, 1950년대 이후에 대한 접근이 분절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선행연구의 부족과 단절성은 배성룡이 사상사적으로 주목할 가치가 없는 인물임을 말해주지 않는다. 지금껏 배성룡이 주목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오히려 그간의 사상사와 지식인 연구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자유주의, 민족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거대한 이념에 따라 지식인을 분류하거나, 특정 이념이나 사조가 얼마나 '제대로' 이해되었는지 혹은 얼마나 '독창적인' 해석과 전유가 등장했는지를 기준 삼는다면 배성룡과 같은 지식인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당대나 지금이나 그다지 조명받지 못한, 하지만 지식인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주변적 전형'이었다.

배성룡의 관심사는 현재 그를 수식하는 민족주의, 사회주의, 자유주의 등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 식민지기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배성룡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가치는 '합리성'이었다. 다만 배성룡이 이야기하는 '합리성'의 성격은 시대, 이념, 구조에 따라 적잖이 달라졌다. 그는 이러한 시대, 이념, 구조의 변화에 맞춰 기민하게 자신이 생각하는 '합리성'을 합리화해감으로써 당대를 대표하는 유력 매체에 글을 기고하는 지식인으로 계속해서 남을 수 있었다.

일제 식민지기 초기 사회주의자 대부분이 그러했듯 배성룡 역시 다양한 사조들과의 느슨한 관계 속에서, 사회주의를 과학과 합리성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그가 지도적 이론가로 활동했던 사상단체 '화요파'의 입장이기도 했다. 다만 초창기 사회주의자로서 배성룡이 가졌던 사회주의에 대한 생각은 오래 지속되기 어려웠다. 이미 1920년대 초반부터 맑스주의로의 급격한 '전일화(專一化)'가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배성룡은 '일월회'의 이우적으로부터 속학적 맑스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학문과 운동 모두 맑스주의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했는지가 기준이 되었던 식민지 조선에서 배성룡이 설 자리는 없었다.

해방 이후 배성룡은 김규식계 정치인으로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에 참여했으나, 분단이 현실화하자 대한민국 지지로 입장을 바꿨다. 배성룡에게 이는 '전향'이나 '변절'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일제 식민지기 형성된 사민주의적, 혹은 개량주의적 지향을 그대로 이어갔다. 미국과 소련의 군정 아래 다양한 가능성이 열려있던 시기가 지나고, 일단 헌법과 민주적 제도가 수립된 만큼 정치운동 역시 이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배성룡의 입장이었다. 그는 구조 자체를 문제 삼기보다는, 구조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는 지식인이었다.

이처럼 불완전하게나마 나라가 세워지고 민주적 질서가 마련된 가운데, 배성룡이 주장한 '합리성' 역시 정신에서 제도의 차원으로 옮겨갔다. 그는 민주주의 제도에 걸맞은 윤리를 고민하는 동시에, 제도 자체의 합리성과 도덕성을 문제 삼았다. 이 과정에서 배성룡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 세계의 사회과학자로 새롭게 떠오른 막스 베버를 주요하게 참고했다. 다만 그의 베버 이해는 '반공'이나 '자본주의 정신'과 같은 당대의 경향과는 차이가 있었다. 그는 전전 일본의 재정경제학자 시마 야스히코(島恭彦)를 참고했는데, 베버의 정신주의적 경향에 대한 시마의 비판에는 침묵한 반면 법률합리화에 대한 평가는 그대로 가져왔다.

배성룡은 베버를 법률합리화의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했다. 그는 베버를 통해 법률에 의해 매개되는, 추상적 개인이 모여 이뤄지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었다. 배성룡에게 베버란 개신교 윤리에서 기원한 자본주의 정신이 아닌, 개인과 사회를 매개할 공공정신을 주창한 사상가였다. 1950년대 배성룡이 베버를 수용하고 전유한 방식은 그가 식민지기 맑스를 이해한 방식과는 달랐다. 이는 식민지기와 1950년대의 차이는 물론, 도구로서 맑스와 베버가 갖는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배성룡의 지적 행보는 근현대 한국의 지식인이 숱한 구조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고유한 관심사를 이어가기 위해 어떤 전략을 펼치고, 사상가를 어떻게 도구로 이용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