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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명/저자명
1930년대 영화기업의 등장과 조선의 영화 스타 / 이순진 인기도
발행사항
서울 : 한국극예술학회, 2009.10.30
수록지명
한국극예술연구. 제30집 (2009. 10), pp.117-150
자료실
[서울관] 정기간행물실(524호)  도서위치안내(서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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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어번호
KINX2010108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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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930년대 영화기업의 등장과 조선의 영화 스타 / 이순진 1

〈국문초록〉 1

1. 문제제기 2

2. 동인제 프로덕션과 무성영화 시대의 '퍼포머(performer)'들 7

3. 발성영화의 등장과 새로운 '연기자(actor/actress)'에 대한 요구 13

4. 영화기업의 등장과 영화기업화 담론 18

5. 1930년대 후반 양대 스튜디오와 전속 연기자들 23

6. 결론 29

참고문헌 30

1. 기본자료 30

2. 단행본 및 논문 32

Abstract 33

초록보기 더보기

본고는 조선의 영화산업이 구조적 변화를 맞이한 1930년대에 조선영화의 스타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였으며, 그들의 존재 방식의 변화가 사회적, 산업적으로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추적하고자 했다. 1930년대 전반기까지 조선에서 영화는 동인제 프로덕션에 의해 제작되고 공연을 동반한 순회상영을 통해 관객과 만났다. 이는 조선 영화산업이 안정적인 자본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하였고 개인의 숙련된 기술력에 기반한 분업화 또한 이루지 못했으며 전국적, 대규모적으로 배급, 상영될 수 있는 소비시장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빚어진 현상이다. 그러나 또한 이같은 조건으로부터 강제된 제작, 배급, 상영의 관행은 1930년대 전반기까지 조선 영화문화의 특성을 만들어냈으며, 조선영화에서 스타의 존재는 바로 이러한 영화문화 전반의 특성과 연관하여 이해해야 한다. 나운규로 대표되는 조선 무성영화의 스타는 연기라는 전문적 기예를 확보한 전문 연기자이기보다는 시나리오, 연출, 연기, 편집 등의 여러 역할을 소화해야 하는 동인들 가운데 일부였으며, 복제된 이미지를 통해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하는 영화 스타이기보다는 스크린과 무대 위에 함께 존재하는 공연자(performer)였다.

1930년대 중반 발성영화로의 기술적 전환, 영화 전문 인력의 등장에 따른 영화 각 분야의 세대교체, 스튜디오를 갖춘 대규모 영화사의 출현과 같은 변화들이 일어나면서 조선영화의 스타 또는 연기자에 대한 새로운 요구가 대두되었다. 그들은 연기자(actor)로서의 전문적 기예를 갖출 것을 요구받았고 이에 따라 다재다능한 영화인이자 공연자로서의 무성영화 시대 스타들은 발성영화에 적합한 새로운 연기자들로 대체되었다. 조선영화주식회사와 고려영화협회를 비롯하여 이 시기에 등장한 대규모 영화사들은 인기 스타들을 전속으로 묶어두거나 연기의 능력을 갖춘 배우들이 포함된 극단들과 긴밀한 사업적 관계를 맺으면서 발성영화에 적합한 연기자들을 확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같은 변화는 길게 지속되지 못했는데, 이는 기업적 발전이 식민지 조선을 제약하는 근본적 조건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This work examines the changing status of film stars during the 1930s, when the colonial Korean film industry was undergoing structural changes. In particular, it pays close attention to the social and industrial implications of star status. Prior to 1930s, Koreans films were made through small scale coterie production (“donginje”). The films were often shown to audience along with theatrical performances through traveling roadshows. These modes of production and exhibition were results of the lack of capital investment within film industry as well as the inadequacy of technological expertise. The underdevelopment of large scale, i.e., nation-wide, distribution and exhibition networks also contributed to the longevity of the system.

Nevertheless, these industrial features are crucial historical backdrop to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the colonial Korean cinema of the 1930s. Moreover, the social and cultural significance of the emerging film stars needs to be interpreted the accordant historical context. Film stars, as exemplified by Na Ungyu, was not just a professional who cultivated and devoted to the art of acting; rather, he or she was a part of the larger film production coterie who had to involve in various pre- and post-production labors, including screenwriting, directing, editing and, of course, acting. Furthermore, they often joined the traveling roadshow screenings to give live performance to audience as “performer-participant,” offering more than recorded images to the silver screen.

The advent of “talkie” pictures brought structural changes in the 1930s, and the area of film acting was no exception. Now, actors had to demonstrate narrower, but more professional expertise in acting, and a new wave of actors took the center stage as the older generation, who involved in many areas of filmmaking labor, receded into backstage. The major film production companies of the era formed close ties with the young generation of star actors, either by establishing exclusive contracts with them or through forming close business ties with the existing theater companies. It should be noted, however, that the new business practice did not last long, for the “industrial development” of Korean film production could not find proper place within the political reality of colon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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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별산대놀이>를 중심으로 한 僧과장의 등장인물과 역사적 전개에 관한 小考 崔尹榮 pp.13-47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한일 고전설화의 연극화와 현대화에 관한 비교연구 서연호 ;부백 pp.49-84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1920년대 프로희곡과 '감정'의 수행성 이민영 pp.85-116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1930년대 영화기업의 등장과 조선의 영화 스타 이순진 pp.117-150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일제 말기 관람문화와 조선영화 관람의 의미 경지현 pp.151-183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일제하 전시체제기 이동연극 연구 :이동연극 1대와 극단 현대극장을 중심으로 이덕기 pp.185-218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연극 <북진대>와 유치진의 친일극 李貞淑 pp.219-245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1950년대 여성국극의 공연과 수용의 성별 정치학 김지혜 pp.247-280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조선족 극작가 한원국의 초기 희곡 연구 김남석 pp.281-320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한국근현대연극사의 전통 담론과 근대성 백현미 pp.321-360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1970년대 한국 실험연극의 담론 :초기 미국아방가르드 형식미학의 수용을 중심으로 백로라 pp.361-397 원문보기 (음성지원)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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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참고문헌 국회도서관 소장유무
1 「활극의 인기남 로로의 니야기」, 녹성(綠星), 경성: 녹성사, 대정 8년(1919). 미소장
2 「토키 시대 경성에도 발성영화, 어대서 먼저 상영하나 쟁투(爭奪)의 백열전(白熱戰)을 연출」, 동아일보1930년 1월 24일. 미소장
3 [영화계 소식] 토키전의 백열화」, 중외일보1930년 1월 24일. 미소장
4 「정월에 흥행할 영화가 쇄도 토키만 삼백삼십칠권」, 동아일보1933년 12월 14일.「토키 검열기 도서과에서 비치」, 동아일보1934년 3월 4일. 미소장
5 「경성촬영소 처음으로 설치-배우도 모집」, 조선중앙일보1934년 10월 11일. 미소장
6 「六十圓 일흔 文藝峯」, 삼천리 제8권 제2호 1936년 2월 1일. 미소장
7 「春史式 製作法」, 조선일보 1936년 12월 12일. 미소장
8 「「극단고협(劇團高協)」 組織, 三月부터北鮮巡業」, 동아일보 1939년 3월 1일자 5면. 미소장
9 「「朝映」 崔社長後援下에 「朝鮮舞臺」 結成, 創立公演은 六月中旬」, 동아일보 1940년 5월 30일 5면. 미소장
10 「한약국, ‘목로집’ 시찰, 조선승무도 감상, 명 감독 스턴벅씨 昨日 입경, 영화인의 환영 성대」, 조선중앙일보 1936년 9월 4일 2면. 미소장
11 「대망의 조선영화-주식회사 창립, 최남주씨를 중심으로」, 동아일보, 1937년 7월 21일 6면. 미소장
12 「新人의 抱負, 朝鮮映畵 株式會社 崔南周 방문기」, 삼천리 제10권 제12호, 1938년 12월 1일. 미소장
13 「議政府스타듸오, 映畵의 平和스러운 마을」, 삼천리 제11권 제4호, 1939년 4월1일. 미소장
14 「[예원인 언파레드 5] 출연마다 조흔 기회 얻는 배우, 티없는 문예봉씨」,동아일보1937년 8월 3일 6면. 미소장
15 <[예원인 언파레드 7] 초기의 영화계에 활동이 만흔 조달한 이경선씨>,《동아일보》, 1937년 8월 6일. 미소장
16 「企業으로써의 映畵事業과 具體案 : 組織, 撮影所, 配給網, 直營館, 其他」, 조선일보, 1935년 7월 6일. 미소장
17 「진솔한 기술가의 출현과 각자 역량의 총집결: 조선연극의 향상정화, 조선영화의 재건방책」, 조선일보, 1934. 6. 19-20. 미소장
18 「영화예술 본질의 파악과 기술적 전환기」, 조선일보, 1934. 6. 10(상),12(하) 미소장
19 「우리 민중은 어떠한 영화를 요구하는가-를 논하야 만년설 군에게(7)」,중외일보, 1928년 8월 18일, 3면. 미소장
20 「조선영화계의 현재와 장래」, 조선일보, 1928년 1월 4일. 미소장
21 「조선영화감독고심담: <먼동이틀때>의 회고(유고)」, 조선영화 제1집, 조선영화사, 1936 미소장
22 朝鮮映畵人 언파레드 소장
23 「朝鮮映畵의 製作傾向 (四) : 一般製作者에게 告함」, 중외일보, 1930년 5월 9일자 3면. 미소장
24 「朝鮮에잇서서 映畵製作事業의 將來性: 모-든企業中에서利潤이豊富한事業」, 조선일보, 1935년 7월 6일. 미소장
25 朝鮮映畵 企業論 소장
26 실록 한국영화총서(상), 국학자료원, 2002. 미소장
27 우리영화 100년, 현암사, 2001. 미소장
28 , 「미국에서의 스타시스템의 출현」, 크리스틴 글레드힐 엮음,조혜정, 박현미 옮김, 스타덤 : 욕망의 산업 I, 시각과 언어, 1999. 미소장
29 『한국근대연극사』, 단국대 출판부, 1996. 미소장
30 식민지시대 조선영화 남성 스타에 대한 연구 : 나운규와 김일해를 중심으로 소장
31 조선 무성영화의 활극성과 공연성에 대한 연구 소장
32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 도서출판 소도, 2004. 미소장
33 『한국 초창기의 영화이론』, 집문당, 1997. 미소장
34 朝鮮總督府 警務局, 活動寫眞 フィルム。檢閱槪要, 昭和 6年(1931). 미소장
35 연쇄극(連鎖劇) 연구 소장
36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고려영화협회와 영화신체제 , 한국영상자료원, 2007. 미소장
37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사연구소 편,한국영화사 구술총서 04: 한국영화를 말한다,한국영상자료원, 2007. 미소장
38 한국예술연구소 엮음,『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성동호/이규환/최금동』, 도서출판 소도, 2003. 미소장
39 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이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윤봉춘 편, 2004 미소장
40 한국예술연구소 엮음,『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성동호/이규환/최금동』, 도서출판 소도, 2003. 미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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