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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변(靈辨, 477-522)은 북위(北魏) 후기에 활약했던 『화엄경(華嚴經)』의 주석가인데 그가 지은 『화엄경론(華嚴經論)』 100권은 중국불교사상 『화엄경』(60권) 전체에 대한 최초의 주석서이다. 하지만 『화엄경론』이 출현한 후 160여 년간 민간에서만 유통되어 불교계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당(唐) 영순(永淳) 2년(683)이 되어서야 장안(長安)에 소개되고 아울러 당시 불교계로부터 높이 평가되었으니 『화엄경론』의 ‘재발견’이라 부를 만하다. 그후 『화엄경론』은 중국에서 다시 자취를 감추었으며 흔히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속장경(續藏經)』에 수록된 제10권뿐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1950년대 일본에서 그 중 다섯 권(제3, 14, 16, 17, 18권)이, 1990년대 한국에서 다섯 권(제52, 53, 54, 55, 56권)이 발견되어 비록 전체는 아니지만 1600년 전의 저작이 다시 햇빛을 보게 되었다.

영변의 생애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법장(法藏)의 『화엄경전기(華嚴 經傳記)』에 나온다. 『전기』에 따르면 영변의 생애는 다섯 시기, 즉 청년기의 배움, 오대산(五臺山)에서의 수행, 현옹산(懸瓮山)에서의 『화엄경론』 저술, 낙양(洛陽)에서의 『화엄경론』 완성 및 궁중 강경(講經), 융각사(融覺寺)에서의 정양(靜養)과 입적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전기는 영변 일생의 가장 중요한 일인 『화엄경론』의 찬술 및 저술 동기와 과정에 대한 비교적 온전한 기록이라 할 수 있으며, 『화엄경론』이 어떻게 당대(唐代)에 재발견되었는지에 관하여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후대 영변의 전기에 대한 기술은 대부분 법장 『전기』의 설을 계승하여 내용상 큰 변화가 없다. 하지만 혜상(慧祥)의 『고청량전(古淸凉傳)』과 징관(澄 觀)의 『연의초(演義鈔)』를 자세히 고찰해 보면 법장 『전기』의 내용에 의심스러운 점이 상당하다. 영변의 오대산 수행 부분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낙양에서 찬술하고 강경했다는 설 역시 법장이 덧붙인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처럼 법장의 『전기』 속 『영변전』에 대해 재검토해 본 결과 그 대부분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법장이 ‘재구성’한 결과물임을 발견하였다. 그러한 ‘재구성’의 배후에는 당대의 오대산 ‘성산화’ 운동과 황실 권력에 의지한 불교 번영이라는 사회적 배경이 있다. ‘재구성’의 기본적 사고방식은 영변의 평민적 이미지를 바꾸어 그를 법장 자신과 가까운 궁정 승려로 만드는 것이었다. 만약 중국 화엄사상 발전의 어느 시기에 오대산계와 종남산계 양대화엄 체계의 대립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법장의 『영변전』 재구성은 작자가 오대산계 화엄을 흡수하고 개조시키며 아울러 이를 통해 종남산계 화엄의 정통적 지위를 확립하려 시도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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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华严经论≫的再发现与 ≪灵辨传≫的 "再构成" 장문량 pp.79-104
Vinaya Elements in Āgama Texts as a Criterion of the School Affiliation : Taking the Six vivādamūlas as an Example 정진일 pp.9-41
『대지도론』의 선 바라밀 김홍미 pp.43-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