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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庚申慘變(일명 간도참변)’ 이후 만주의 항일운동 세력은 일본군에 의한 물적·인적 피해를 극복하고 새로운 항전기지 구축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남만주에는 正義府와 參議府가 설립되었고, 북만주에는 新民府가 설립되어 1920년대 중반 남·북만주를 대표하는 3부의 성립을 이루었다.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하여 신민부는 대종교 무장세력과 북만주 民團 대표들이 함께 결성한 독립운동단체라는 점에서 1920년대 중·후반 대종교 세력의 독립운동을 파악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된다.
본 논문에서는 1920년대 중후반 대종교 세력의 활동을 크게 두 계열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하나는 대종교총본사를 중심으로 종교활동 및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金敎獻·尹世復 등 핵심인물들이다. 경신참변 이후 제2대 도사교 김교헌은 寧古塔에서 대종교부흥운동을 전개하여 대한군정서 재건을 뒷받침했다. 한편 윤세복이 주도하던 1926년의 대종교총본사는 奉天省長 張作林이 내린 ‘대종교금지령’에 따라 모든 활동을 금지당했다. 그 원인으로 대종교 세력의 국내 특파작전이 추진되고 있었던 사실을 본 논문에서 새로 밝혔다.
또 다른 계열은 대한군정서 및 신민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무장세력이다. 대한군정서는 1921년 9월 총재 徐一의 사거로 해체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부총재 玄天默이 계승하여 金赫·金佐鎭·曺成煥·鄭信 등과 함께 재건에 성공하였다. 이후 대종교 세력은 독립군 통합운동을 추진하면서 ‘夫餘族統一會’를 거쳐 신민부 성립을 이끌어냈다. 대종교와 대한군정서·신민부의 연관성은 주요 인물들의 역할, 종교적 배경, 이념의 정합성, 활동 등을 중심으로 파악하였다.
1920년대 후반 대종교 세력은 ‘대종교금지령’ 이외에도 주요 간부들이 고령으로 사거하거나 일제에 피체되고, 신민부 해체까지 겪으면서 점차 약해졌다. 더욱이 1920년대 중·후반 북만주에 확산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도 대종교 세력의 약화에 주요한 원인이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1920년대 후반이 되면 김좌진, 정신 등은 대종교 이념에 무정부주의를 수용하여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했는데, 그 과정들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1920년대 중·후반 대종교의 독립운동은 연구 공백으로 남아있었다. 그 배경에는 먼저, 1926년 ‘대종교금지령’으로 대종교에서조차 1920년대 중·후반의 시기를 ‘단절의 시기’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사료의 미발굴로 청산리전투 이후 대한군정서와 대종교 무장세력의 명멸에 대해서는 연구되지 못했다. 본 연구를 통해 1920년대 대종교 세력의 항일운동은 결코 단절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친일배 척결, 자치기구 결성, 무정부주의 수용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항일운동을 지속했던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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