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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1930년대 항주(杭州) 시기 중국 민속학과 손진태 『조선민담집』 중역(中譯)의 배경 = Chinese folklore and the background of Son Jin-tae's translation of Joseon Folktales into Chinese during the Hangzhou Period in the 1930s / 권애영 1
국문초록 1
차례 3
1. 머리말 3
2. 항주 시기 중국 민속학과『예풍(藝風)』 월간 6
3. 종징원 부부와 손진태『조선민담집』 번역의 배경 13
4. 맺는말 22
참고문헌 24
Abstract 26
1925년 저우쭤런(周作人)은 미와 다마키의 전설의 조선(傳說の朝鮮)에서 발췌한 우리나라 민담 3편을 가장 먼저 중국에 소개하였다. 이후 1930년대에 이르러서 미와 다마키(三輪環)와 가린 미하일로프스키(Garin Mikhailovsky), 마쓰무라 다케오(松村武雄)가 수집한 우리나라 민담이 번역되었다. 그리고 손진태의 조선민담집(朝鮮民譚集)에서 발췌한 민담을 포함해 조선 민담 41편이 잡지 세 곳에 소개되었다. 조선 민담 41편을 번역한 ‘추자(秋子) 여사’는 중국 민속학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종징원(鍾敬文)의 부인인 천츄판(陳秋帆)이다.
본고는 1930년대 중국에 손진태의 조선민담을 비롯한 우리 구비문학이 소개될 수 있었던 배경을 중국의 민속학 동향과 연관지어 살펴보았다.
중국의 민속학 연구는 신문화운동 시기였던 1918년 북경대학교에 「근세가요징집처(近世歌謠徵集處)」가 성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이 단체는 「가요연구회」로 이름을 바꾸고 1922년부터 가요(歌謠) 주간지를 출판하여 조직적인 민속학운동을 벌였다. 1926년 가을, 북양 군벌의 강요로 인해 주요 인사들이 잇따라 강제로 사직하고 북경을 떠나 중산대학으로 옮기면서 중산대학은 중국 근대 민속학 발전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 중산대학의 민속학이 퇴조하면서 항주를 중심으로 한 ‘중국 민속학회’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이 시기 항주에서 ‘예풍사(藝風社)’라는 예술단체가 설립되었다. 예풍사의 주요 구성원은 쉬페이홍(徐悲鴻)을 비롯하여 종징원ㆍ펑쯔카이(豐子愷) 등으로 상해와 항주 일대에서 활동하던 화가들이 주로 가입하였고 회원수가 600여 명에 이르렀고, 이들이 만든 예풍(藝風) 잡지에 민속학을 전문으로 다루는 코너가 개설되었다. 종징원의 글이 발표되는 1권 9기부터 그동안 주로 미술을 조명하던 예풍에서 민속학 관련 내용을 다루었다. 종징원이 발표한 글은 대부분이 일본 유학 시절에 투고한 것으로 우리나라와 관련된 「노달치형 전설」 및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도 있다.
1934년 봄부터 1936년 여름까지 종징원은 일본 와세다 대학 문학부에서 민속학ㆍ문화인류학 공부와 더불어 일본에 있던 중국문학 연구회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종징원은 니시무라 신지(西村眞次)ㆍ마츠모 노부히로(松本信廣)ㆍ마쓰무라 다케오 등의 학자와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ㆍ사네토 케이슈(實藤惠秀)ㆍ마스다 와타루(增田涉) 등의 중국문학 연구자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종징원은 자국의 민속학의 근원과 영향을 살피는 차원에서 주변 국가의 문화연구가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손진태의 조선민담은 결국 중국 민속학의 근원을 찾는 목적과 더불어 민속학적 측면에서 연구 가치가 있다는 판단 아래 번역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손진태의 민담이 일본어로 쓰여 있었기에 이를 번역하여 중국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데 편리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즉 조선민담의 중국 번역은 먼저 일본과 일본어라는 매개 및 중국 민속학의 근원을 알아내는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에 가능했다. 근대적인 연구방법을 동원하여 조선인 학자에 의해 수집된 우리 민담이 중국에 소개될 수 있었던 데는 불행하게도 식민지 조선의 상황도 한몫을 했다. 본고는 조선민담의 번역자인 천츄판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하고 부부라는 이유로 종징원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전개한 점은 한계이다. 앞으로 객관적이고 유의미한 자료가 많이 확보되어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기를 바란다.번호 | 참고문헌 | 국회도서관 소장유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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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藝風』 2권 9기. | 미소장 |
2 | 『藝風』 2권 12기. | 미소장 |
3 | 『藝風』 3권 3기. | 미소장 |
4 | 『藝風』 3권 4기. | 미소장 |
5 | 『藝風』 3권 5기. | 미소장 |
6 | 『藝風』 3권 6기. | 미소장 |
7 | 『藝風』 3권 8기. | 미소장 |
8 | 『藝風』 3권 9기. | 미소장 |
9 | 『藝風』 3권 10기. | 미소장 |
10 | 『藝風』 4권 1기. | 미소장 |
11 | 姜在哲, 「解題」, 『국문학논집』 제17집, 2000, 377면. | 미소장 |
12 | 권애영, 「1920∼30년대 중국의 조선설화 번역 의도 고찰-미와 다마키(三輪環)의 『전설의 조선』과 마쓰무라 다케오(松村武雄)의 『일본동화집』 「조선부」를 중심으로-」, 『중국문화연구』 제57집, 2022, 46면. | 미소장 |
13 | 권혁래, 「손진태 『조선민담집』 연구-설화의 성격과 분류체계를 중심으로-」, 『한국문학논총』, 2013, 29∼30면. | 미소장 |
14 | 손진태 저, 이시준·장경남·김광식 편, 『조선민담집』, 제이앤씨, 2013, 6면. | 미소장 |
15 | 송화섭,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역사민속학(歷史民俗學)의 태동(胎動)과 전개(展開) -손진태(孫晉泰) 민속학(民俗學)을 중심으로-」, 『남도민속연구』, 2011, 241∼243면. | 미소장 |
16 | 鐘敬文, 鄭憲哲 번역, 「老獺稚型 傳說의 發生地 - 服部宇之吉과 西村眞次 두 박사께 드림」, 『국문학논집』제17집, 2000, 417면. | 미소장 |
17 | 홍윤희, 「저우쭤런의 민속학 연구와 신화」, 『중국어문학논집』, 2005, 434∼437면. | 미소장 |
18 | 金柄珉·李存光 主編, 『中國現代文學與韓國·飜譯編』, 延邊大學出版社, 2014, 4∼54면. | 미소장 |
19 | 董曉萍, 「鍾敬文留日研究:東方文化史與民俗學」, 『北京師範大學學報』 257기, 2016, 21면. | 미소장 |
20 | 劉鐵梁, 「中國民俗學發展的幾個階段」, 『民俗研究』, 1998, 82, 83면. | 미소장 |
21 | 石晶, 「≪藝風≫月刊(1933.1-1937.3)研究」, 東北師範大學博士論文, 2012, 13∼16면. | 미소장 |
22 | 石晶, 「開拓與探索的歷程-1930年代鍾敬文與民俗學創建發展的回顧-」, 『社會科學戰線』, 2012, 281면. | 미소장 |
23 | 石晶, 「民國時期≪藝風≫月刊考略」, 『圖書館學研究』, 2017, 80면. | 미소장 |
24 | 吳眞, 「鍾敬文在日本的文學活動與民俗硏修」, 『民族文學硏究』, 2011, 118∼124면. | 미소장 |
25 | 程豔林, 「中國現代民俗學發展的“杭州時期”研究」, 『民俗學研究』, 2019, 82면. | 미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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