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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쌍릉에 관한 문헌자료와 고고자료에 대한 검토를 통해 쌍릉이 익산에 조영된 역사적 배경과 피장자 문제를 고찰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익산 쌍릉은 후조선 무강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알려져 왔으나 무왕과 무왕비의 무덤이라는 인식도 공존하였다. 그리고 1917년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 및 연구를 통해 대왕릉은 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다만 조영 시기와 수릉의 문제가 있으며, 소왕릉의 경우에는 여전히 조영 시기와 함께 피장자의 문제가 논란이 되었다.
이에 본고에서는 쌍릉의 축조 시기와 피장자 문제를 당시의 정국상황을 통해 파악해 보았다. 630년에 사비로 환궁하였던 무왕은 639년 정월 미륵사 서탑의 사리봉안 의식을 위해 익산 왕궁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익산 왕궁에서 사망함으로써 익산지역에 안장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무왕은 익산 거주 중에 자신의 능을 익산에 조성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무왕의 무덤인 대왕릉의 조성 시기는 빨라도 639년을 소급하기 어렵지 않을까 한다.
소왕릉의 조영 시기와 피장자 문제는 『日本書紀』에서 확인되는 642년에 사망한 ‘國主母’의 실체를 통해 파악해 보았다. 642년에 사망한 의자왕의 어머니를 사탁왕후로 보면서 소왕릉의 피장자를 사탁왕후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렇지만 〈사리봉영기〉의 내용을 통해 볼 때 사탁왕후를 642년에 사망한 의자왕의 어머니로 보기 어렵다. 특히 의자왕의 어머니가 사망한 후 정변으로 어머니의 일가를 비롯해 관련 귀족들이 숙청되었다. 이는 정치세력의 변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익산세력에서 사씨세력으로의 권력변동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즉, ‘國主母’는 의자왕의 친모이면서 익산지역 재지세력의 여성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소왕릉의 피장자는 642년에 사망한 ‘國主母’인 의자왕의 친모이며, 조성 시기는 642년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쌍릉이 180m 떨어져 조성된 배경은 무왕의 제2비인 사탁왕후가 생존해 있었고, 그녀의 영향력으로 인해 선화왕비를 무왕과 합장하거나 봉분을 무왕릉 옆에 조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This paper puts an in-depth study on how Twin Royal Tombs in Iksan was constructed and what issues the buried person had through investigating literature and archaeological materials from a historical perspective. Twin Royal Tombs in Iksan have been known as the tomb of King Mugang and his queen, but the recognition that they might be the tomb of King Mu and his queen also coexisted. Several investigations and studies have confirmed a high possibility that the big royal tomb could belong to King Mu since 1917. However, there are still issues regarding the burial period and the Sureung, along with controversial disagreements for the small Twin Royal Tomb regarding the construction period and the buried person.
Therefore, this paper tried to identify the construction period and the issues of the burial person of the Twin Royal Tombs, considering the political situation of that time. King Mu. Who returned to Sabi palace in 630 and to the Iksan palace in the lunar New Year in 639 for the ceremony of enshrining the relics at the West Stone Pagoda of Miruksa Temple. This implies that he was able to be buried in the Iksan area after his death at the Iksan palace. It also means that King Mu constructed his tomb in Iksan while he resided there. Therefore, it indicates that the construction period of the big royal toom dates back to 639 at the earliest.
The construction period and the issues on the buried person of the small royal tomb were examined by investigating King Euija`s mother`s death in 642, which was mentioned in the Nibonsoki. There are arguments that the buried person could be Queen Satak, the mother of King Uija, who died in 642. However, it is unclear considering Queen Satak as the mother of King Uija, who died in 642 in terms of the Inscription of Sarira Enshrinement. In particular, there was a rebellion, and the mother’s entire family, including related nobles, was punished. It suggests that the political power had been shifted from the Iksan clan to the Sah clan. Therefore, this paper suggests that the king’s mother was the biological mother of King Euija and a woman of the local gentry in the Iksan area. It indicates that the buried person at the Tomb of the Small King is the king’s mother, the biological mother of King Euija, who died in 642, and the tomb was constructed in 642.
The reason why the Twin Royal Tombs were built 180 meters apart can be estimated as the fact that Queen Sataek, the second wife of King Mu, was still alive and her political influence was still powerful, which prevented the joint construction of a tomb for King Mu and Queen Sunhwa of placement of Queen Sunhwa’s tomb next to King Mu’s tomb.번호 | 참고문헌 | 국회도서관 소장유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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