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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토대지진은 ‘천재(天災)’로 인한 사망자 약 10만 명뿐만 아니라 학살 등의 ‘인재(人災)’로 인한 희생자가 약 6천 명 발생한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이 사태에 대하여 당시 한일 양국의 기독교인의 인식과 대응 양상을 고찰함으로써, 기독교 신앙과 관념, 종교적 양심 등이 두 종류의 참극 상황에서 어떻게 연관되어 드러났는지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천재’로서의 간토대지진 재난에 대해서도 주류 기독교 지식인은 인명에 대해 경시하는 듯한 ‘낙관적, 관망적 천견론’과 현장의 절규에 집중하는 ‘비애적, 참회적 천견론’으로 크게 나뉜다. 이러한 천재에 관한 이해는 학살이라는 인재에 대한 인식과 대응 태도에도 연결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인재’로서 발생한 학살에 대해서는 그 원인이 된 유언비어나 이후 군경 및 자경단 활동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유언비어를 적극 신뢰하며 자경단 활동에도 참여한 ① ‘적극적 긍정형’, 학살 만행과 참상에 대해 침묵하며 관념적 메시지 속에서 인도적 대응을 외면한 ② ‘소극적 긍정형’이 있다. 하지만 민중과 현장에서 함께 했던 일부 기독교인은 참회적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③ ‘소극적 부정형’으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진으로 인한 학살 사태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노하고 문제 제기하며 정책적 대안까지도 요구하는 ④ ‘적극적 부정형’이 존재한다. 이 유형에는 좌파나 우파 인물을 막론하여 다수의 한일 기독교 지식인이 포함돼 있었다. 이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의 민주주의적 경향과 인명존중 풍조의 확산이 기독교 지식인 층에서도 폭넓게 수용된 결과이다. 동시에 이들 다이쇼 데모크라시 세대가 ③과 ④의 저항적 목소리에 활약한 반면, 우치무라, 우메무라 등 초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이른바 메이지 세대는 ①과 ②의 보수적, 배타적 태도를 취했다. 간토대지진은 이들 기독교인의 시대적 사명이 그 역할을 다하고 새롭게 전환되는 분기점이 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関東大震災は「天災」による死亡者が約10万人であっただけでなく、「人災」、すなわち虐殺による犠牲者が約6千人発生したという二重の性格を持つ。この事態について、当時の日韓両国のキリスト者の認識と対応の様相を考察することで、キリスト教の信仰と思想、宗教的良心などが、この二種類の惨劇の状況においてどのように関連づけられていったか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まず、「天災」としての関東大震災についても、キリスト教知識人たちは、人命を軽視するような「楽観的、観望的天譴論」と、現場の悲痛な叫びに焦点を当てた「悲哀的、懺悔的天譴論」に大きく分かれた。このような天災に関する理解は、虐殺という人災に対する認識と対応態度にもつながる傾向を見せた。「人災」として発生した虐殺については、その原因となった流言やその後の軍警および自警団活動に対する態度を基準に、4つの類型に分けることができる。まず、流言を積極的に信頼し、自警団活動にも参加した①「積極的肯定型」、虐殺の残虐行為と惨状に対して沈黙し、観念的なメッセージの中で人道的対応を見送る②「消極的肯定型」が挙げられる。しかし、民衆の現場に同行した一部のキリスト者は懺悔の態度を示したが、これは③「消極的否定型」として分類できる。最後に、地震による虐殺事態に対して積極的に怒り、問題提起し、政策的な代替案まで要求する④「積極的否定型」が存在する。この類型には左派․右派を問わず多数の日韓のキリスト教知識人が含まれていた。これは、大正デモクラシー時代の民主主義的傾向と人命尊重の風潮の広がりがキリスト教知識人層にも広く受け入れられた結果である。同時に、これら大正デモクラシーの世代が③と④の抵抗する声として活躍したのに対し、内村、植村など初期キリスト教改宗者たち、いわゆる明治期のキリスト教知識人は①と②の保守的、排他的な態度をとった。関東大震災は、これらのキリスト者の時代的使命がその役割を果たし、新たに転換する分岐点となったことをよく示してい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