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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임오화변[壬午禍變, 1762년(영조 38)]의 단초를, 왕의 식사가 갖는 정치적 함의와 ‘성격-체질-식성’의 유관성에 입각하여 사도세자의 어린 시절부터 영조가 15세의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1749년(영조 25) 무렵 까지를 중심으로, 영조의 절식(節食·絶食)과 사도세자의 탐식(貪食)의 대립이 유발한 양자의 관계 악화와 갈등의 복합적 관점에서 탐색해 보고자 하였다.
이에 1장에서는 영조가 성격, 체질, 식성, 체형이 다른 사도세자를 용납하지 못하고, 사도세자의 무절제한 식탐을 자질 부족과 수행력 불신으로 인식하여 ‘탐식의 먹보’, ‘뚱보’로 비난하게 된 양상을 살펴보았다. 2장에서는 영조가 식탁에서 행한 절식(節食·絶食)의 정치적, 권력적 의미를 알아보았다. 그에게 절식은 수신(修身)의 성리학적 경지를 대외에 현시(顯示)하는 주요한 정치적 방편이자 성리학적 제왕학(帝王學)을 반영한 ‘식사의 정치학’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사도세자는 ‘식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자기 조절을 못하는 자-수신하지 않는 자-제왕의 자질에 미치지 못하는 자’로 영조의 불안과 의심을 증폭시켰다. 3장에서는 영조가 군(君)·사(師)·부(父) 일체의 군사상(君師像)이라는 군주상(君主像)을 추구한 배경과, 탐식하는 사도세자가 이를 따르지 않는다고 여겨 압박하면서 임오화변의 서막을 열게 된 양상을 고찰해 보았다. 영조는 ‘절욕(節慾)·절제·절식하며 학문에 매진하는 대효자(大孝子)’인 자신과 대립하는 사도세자를 ‘정욕(情慾)·쾌심·탐식하며 학문을 게을리 하는 불효자(不孝子)’로 대상화하여 부정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임오화변은 ‘절식하는 군사’의 엄격하고 완고한 ‘권력의 식탁’에서 배제된 ‘탐식의 먹보’의 비극적 최후라고 하겠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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