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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조선사회는 ‘이순신 신드롬’에 휩싸였다. 열풍의 배후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이순신 장군 유적 보존 운동’이 있었다. 이 운동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행됐지만, 이를 검열사의 차원에서 복기하는 연구는 보기 힘들다. 관련 기사들이 대부분 검열을 깨끗이 통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936년 ‘을지문덕 장군 묘산보수 운동’은 검열에 저촉되었고 운동은 흐지부지됐다. 전면 삭제된 「乙支文德 墓前에 벙어리 바친 三園兒」가 그 증거이다. 이 기사의 발굴과 복원은 검열과 무관하게 보였던 ‘이순신 장군 유적 보존 운동’을 검열적으로 되돌아보게 만든다. 두 기획의 쌍생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1931년의 폭발적 성공이 1936년의 ‘금지’를 낳았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1931년 일제는 ‘이순신 장군 유적 보존 운동’ 관련 기사들에 대한 검열에 실패했다. 처음엔 방심했기 때문이요, 나중엔 만주사변과 맞물리면서 손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두 ‘유적 보존 운동’을 놓고 벌어졌을 미디어와 검열의 심리전을 복기했다. 특히 1936년 5월 「乙支文德 墓前에 벙어리 바친 三園兒」를 전면 삭제한 ‘검열관 X’의 심리를 추적함으로써, 1931년 검열이 무엇을 놓쳤고 또 얼마나 뼈아파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추리하고 입증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만난 검열관 X는 우리에게 매우 낯선 존재였다. 우리의 생각틀은 운동론적이고 매체-진영론에 입각해 있어서, 사회주의운동이 민족운동보다 더 본원적이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가 개량적 민족주의자보다 더 위험했다고 단정하기 쉽지만, ‘검열관 X’는 운동의 성격도 중요하나 그것과 대중의 결합력(폭발력)이 더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위협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학술’로서 ‘을지문덕’을 호명하는 것은 괜찮지만, ‘을지문덕-성금-어린이’로 연쇄되는 대중운동적 전환은 매우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검열관을 우리는 일찍이 상상하지 못했다. 검열관 X는 검열하는 쪽의 판단과 검열당하는 쪽의 판단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친다.
매체-진영론에 얽매이지 않기에 검열관 X는 개량적인 운동도 특정 국면에서 치열하게 불타오를 수 있음을 보았고 또 그것을 두려워했다. 『동아일보』는 ‘고적보존운동’, 『조선일보』는 ‘조선학운동’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났기에, 두 미디어 사이의 ‘공모’와 대중운동적 확산을 포착할 수 있었다. 모두 우리가 보지 못했거나 눈감아 왔던 국면들이다.
검열 연구, 특히 검열 사례 연구가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검열관이 보고 느낀 것을 연구자인 ‘나’도 보고 느껴야 한다. 이것이 검열 연구가 매체-진영론에 갇혀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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