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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미국 독립 전쟁의 패배는 영국인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으며, 이 패배는 영국 왕실 이미지를 약하게 만들었다. 이에 웨스트민스터 궁 벽화는 빅토리아 여왕 즉위 초기 국가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무너진 영국인들의 자존심을 회복시켜야 했다. 따라서 왕실 구성원인 앨버트 공의 지휘하에 설립된 왕립미술위원회는 벽화 테마로 영국 국가의 정체성과 왕실과 의회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으로 선정했다.
로열 갤러리는 의회 개회식이나 해외 정상들의 만남의 장으로 기능하는 곳으로서 빅토리아 여왕을 영국의 국가적 자부심으로 간주하고, 영국의 영광과 업적을 보여주는 곳으로 기능했다. 따라서 벽화 주제는 영국 군사적 사건 가운데 의미 있는 두 사건, 즉 트라팔가 해전과 워털루 전투가 선택되었다. 트라팔가 해전의 승리와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브리튼의 군주제와 의회의 힘을 과시하는 적합한 주제였다.
매클리즈는 1859년 7월에 프레스코를 시작했으나 조명 문제로 작업을 중지했다. 매클리즈가 로열 갤러리 벽화에 적용한 프레스코 기법은 영국 기후에 적합하지 않았다. 매클리즈는 영국의 습한 기후와 추운 날씨, 스모그 현상 때문에 프레스코화를 포기하고 독일에서 워터글라스를 익혔다. 매클리즈는 워터글라스를 영국에 처음 소개하며 매체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다.
한편 트라팔가 해전과 워털루 전투는 단합된 브리튼의 힘을 상징하며 그 자체가 브리티시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즉위 초반의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이념을 전달하고 브리튼을 통합시키고자 한 주최측의 의도와 작품을 실천한 예술가 간의 이해 차이가 발생했다. 왜냐하면 매클리즈는 아일랜드인으로서 아일랜드의 문화를 파괴한 브리티시의 업적을 기념해야 했기 때문이다. 매클리즈는 아일랜드인의 기여와 역할을 강조해 그렸다.
그 결과 매클리즈의 로열 갤러리 벽화들은 다양한 해석의 층위를 낳았다. 이 과정에서 매클리즈는 웰링턴이나 넬슨과 같은 영웅뿐 아니라 아일랜드인, 여성, 흑인, 아동,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들을 대거 등장시키고 그들의 역할을 조명했다. 매클리즈의 이러한 시도와 노력들은 비록 19세기에는 환영받지 못했으나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주장한 인물로 새롭게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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