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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와 『사기』, 『좌전』 등에 기록된 자공 관련 기사를 읽다 보면, 자공(子貢)은 천운을 타고 난 사람인 듯하다. 그는 공문(孔門)의 다른 제자들과 달리, 학문 연마와 인격 수양에 특별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 않았지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천재적 영감과 유창한 화술, 대중 친화력, 남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능력, 미래를 내다보는 예지력, 통합적 사고 능력을 지녔다. 그는 이러한 소질과 공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국제외교 무대를 누볐고, 화식(貨殖)을 잘하여 일찍부터 ‘유상(儒相)’이란 말을 들었다.
소론은 이러한 국제외교 무대에서의 활약을 살핀 것이다. 자공의 외교 행적을 살피려면 ①정공 15년(B.C.495) 노·주(魯邾) 정상회담에 참가하여 정공의 죽음을 예언했다는 것, ②애공 6년(B.C.489) 초 소왕(楚昭王)과 면담하여 공자 일행을 조난[陳蔡之厄]에서 구출했다는 것, ③애공 7년(B.C.488)의 오(吳) 태재(太宰) 백비(白嚭)와 회견하여 노(魯)를 위기에서 구원했다는 것에서부터 고찰을 시작해야 하지만, 본고에서는 ④애공 11년(B.C.484) 제(齊)와의 전쟁 때 노(魯)를 위해 활약하며 공자를 귀국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것, ⑤애공 12년(B.C.483) 위 출공[衛出公]이 오(吳)의 탁고(橐皐)에 고립되었을 때 기지를 발휘하여 출공을 구출하고, 이와 더불어 송(宋)·노(魯)·위(衛)의 연합을 결성하여 오(吳)의 중원 진출을 도중에 차단시켰다는 것, ⑥애공 15년(B.C.480) 진성자(陳成子)와 회담하며 난제로 여겨졌던 노(魯)와 제(齊)의 강화 회담을 노(魯)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고, 거기에 더하여 제(齊)에 빼앗겼던 노(魯)의 고토(故土)를 되찾아오는 데에도 기여를 했다는 것, ⑦애공 26년(B.C.469) 위 출공이 망명지에서 귀국할 방도를 물었을 때 국제 정서를 논하며 그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조언했다는 것, ⑧월(越)과의 강회 회담을 앞두고 계강자(季康子)가 한 말(애공 27년, B.C.468) 등을 분석하여 당시 국제외교 무대에서는 자공이 관면(冠冕)의 위치에 있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공의 화식(貨殖) 활동과 공자의 유학이 현학(顯學)이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의 외교 및 화식 활동은 1차적으로는 그의 성격 및 인생관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공자에게 받은 가르침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음을 주장했다.
생각컨대 자공의 인생관은 ‘서(恕)’의 원리 곧 ‘일이관지(一以貫之)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공자가 자공에게 준 가르침도 이 점에 포인트가 있었다. 『모든 일은 보편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니 인사(人事)를 처리할 때에는 항상 서(恕)의 입장에서 임하라』자공은 영민한 자질 덕분에 공자의 이 가르침을 잘 깨달았고, 이에 후세에 사리에 달통[達]하였다는 세평(世評)을 얻었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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