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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9~20세기 경상남도 함안지역의 유학자 惕菴 趙瀚奎(1887-1957)의 학문과 현실인식론을 살펴보기 위해 쓴 것이다. 그는 대내외의 정세가 불안했던 19세기 말에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한국전쟁까지 겪어낸 인물이다. 조한규는 1916년 계화도에 있던 艮齋 田愚(1841-1922)를 찾아가 집지하고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전우는 조한규에게 ‘惕菴’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1922년 전우가 세상을 떠난 뒤, 조한규는 ‘수선계’를 만들고 후학을 양성하며, 백운정사에서 講會를 열었다. 또한 전우의 영정을 백운정사와 의산서당에 모시며 스승에 대한 존모를 이어나갔다. 그가 이토록 강회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나라가 망하자 계화도에서 守死善道의 정신으로 유학의 도를 부지하여 후학에게 전해주어야 한다는 전우의 정신을 계승했기 때문이다.
조한규는 스승의 학문을 지키고 전파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전우의 주요 문인이었던 吳震泳‧柳永善 및 경상도 지역에 거주했던 동학들과 함께『간재집』 진주본 간행에 힘썼다. 그는 전우의 「性尊心卑的據」를 비판한 조긍섭의 「性尊心卑的據辨」에 대해 다시 비판한 「性尊心卑的據辨辨」을 지어 스승의 설을 변호하기도 하였다. 이는 한주학파·노사학파·퇴계학파 등 학파끼리 사상적으로 많은 논쟁이 있던 경상도 지역에서 스승 전우의 ‘性尊心卑說’을 지키고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었다.
조한규의 저술 「大東聯史按說」은 우리 민족의 역사를 기억하여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대동연사안설」에서 그의 온건개화적 역사인식을 살필 수 있는데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을 보였으며, 서양문명이 늦게 들어온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였다. 급진적 개화를 추진했던 김옥균에 대해서는 부정적 시각을 보였으며, 이를 통해 자주적 국가 외교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조한규가 조소앙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주적이며 민본주의에 입각한 국가건설론을 주장했음을 엿볼 수 있다. 조한규는 정치적으로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찬성하였으며, 미‧소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 경제적으로는 일본이 남기고 간 토지는 국가가 소유하여 인민들에게 무상으로 골고루 나누어 주자고 주장하였으며, 일본이 주조한 화폐는 모두 폐기하고 새로운 국가의 법정 화페를 만들어 인민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주장을 하였다. 특히 민본주의적 관점에서 공평하고 균일한 경제정책으로 민중의 삶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처럼 19~20세기 모진 시기를 살아가면서 현실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던 지식인이었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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