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호기사보기
기사명 | 저자명 | 페이지 | 원문 | 기사목차 |
---|
대표형(전거형, Authority) | 생물정보 | 이형(異形, Variant) | 소속 | 직위 | 직업 | 활동분야 | 주기 | 서지 | |
---|---|---|---|---|---|---|---|---|---|
연구/단체명을 입력해주세요. |
|
|
|
|
|
* 주제를 선택하시면 검색 상세로 이동합니다.
1950년대, 1960년대의 재일조선인의 기관지를 보면 재일조선인의 문화활동은 총련계가 압도적으로 활발했다. 이에 반해 민단계의 문화활동은 미미했다. 그 원인은 민단의 조직력, 지도력이 약한 상황에서 문화단체를 형성하기 어려웠고 기관지 『민주신문』의 문화면 역시 내용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신문』은 대부분 재일조선인 사회 속에서 활동하는 문화인(예술가)의 활동보다는 조선, 한국의 문화를 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고 총련 기관지(紙)처럼 신문을 활용하여 ‘조선어’를 배우거나 예술분야의 신인 양성을 하는 모습은 없었다.
1960년에 한국의 ‘4・19’, 북한의 ‘남북연방제’ 제안 등으로 민단은 크게 동요했었고 ‘5・16 쿠데타’가 일어날 무렵에는 민단 단장도 바뀌어 민단계의 유일한 문화단체와도 대립하게 된다. 또 이 무렵 이례적으로 총련, 민단을 불문하고 문화인이 모여 합동문화제를 개최한 데에 민단의 지도층은 강한 불만을 표시한다. 이로 인해 총련 기관지나 중립입장의 『통일조선신문』에는 합동문화제에 대해 기사가 실리지만 민단의 기관지에는 관련기사가 게재되지 않았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조직력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면서 1961년 전후에 유일하다고 할 수가 있는 김파우의 작품이 『민주신문』에 연재된다. 하지만 이후 재일조선인에 의한 작품이 아닌 일본인 작가나 한국에서 발표된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해서 연재되다가 이마저도 이어가지 못하고 작가를 양성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에는 한계가 나타나고 있었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전화번호 | ※ '-' 없이 휴대폰번호를 입력하세요 |
---|
기사명 | 저자명 | 페이지 | 원문 | 기사목차 |
---|
번호 | 발행일자 | 권호명 | 제본정보 | 자료실 | 원문 | 신청 페이지 |
---|
도서위치안내: 정기간행물실(524호) / 서가번호: 대학01
2021년 이전 정기간행물은 온라인 신청(원문 구축 자료는 원문 이용)
우편복사 목록담기를 완료하였습니다.
*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저장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