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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고구려 말기 집권자였던 연개소문의 생몰년에 대해 알아보았다. 연개소문의 생년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의 보덕이암조에 인용된 『唐書』와 『高麗古記』를 주목하여 기존 사료들과 교차 검증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高麗古記』 보다는 기존의 사료와도 일정 부분 교차검증이 가능한 『唐書』에 신뢰성이 있다고 보았다. 『唐書』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생년은 613년 혹은 614년으로 추측된다. 이는 선행연구에서 추론했던 연개소문의 생년대인 610년대와도 부합한다.

연개소문의 몰년에 대해서는 666년 설, 665년 설, 664년 설, 663년 설을 재검토하였다. 이에 『舊唐書』‧『新唐書』‧『資治通鑑』‧『冊府元龜』‧『三國史記』‧『日本書紀』‧「泉男生墓誌」‧「泉獻誠墓誌」에 기술된 고구려의 내전 상황부터 살펴보았다. 그 결과 666년 5월은 천헌성이 당에 입조한 시기이고, 666년 6월 7일은 고종이 글필하력에게 출병 조서를 내린 시점으로 연개소문의 사망시점을 전하는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재확인하였다. 통설에서는 「泉男生墓誌」에서 전하는 남생이 태막리지에 취임한 시기인 665년 설을 연개소문의 몰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665년은 남생이 태막리지에 취임한 시기일 뿐 연개소문의 사망시점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664년 설은 『일본서기』의 기록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일본서기』는 연개소문의 몰년을 유언과 함께 구체적으로 664년 10월로 기술하고 고구려와 긴밀하였던 왜의 기록인 만큼 언뜻 가장 신뢰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고구려의 내전을 666년이 아닌 667년으로 기술하여 1년의 기년오차가 있다. 663년 설은 이러한 『일본서기』의 1년 오차를 조정하여 도출된 견해이다. 『일본서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연개소문의 사망과 고구려의 내전을 3년의 시차를 두고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염두하고 기년을 조정한다면 연개소문의 몰년은 663년으로 볼 수 있다. 연개소문 사망 후 남생이 태막리지에 취임한 시기는 665년이다. 663년 설은 연개소문의 사망인 663년과 남생의 태막리지 취임인 665년 사이의 3년의 시차를 고구려의 3년상 풍습으로 이해하였다.

널리 알려졌듯이 고구려와 당은 661~662년에 치열한 전쟁을 치렀다. 당은 수천 척의 함선을 동원하고도 패배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 토번의 도전을 받게 되고, 대내적으로도 경제와 민생이 불안정한 정국에 놓였다. 결국 663년 8월 당 고종은 패전의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고구려 침공 준비를 중단하는 조서를 발표하면서 사실상 고구려와의 종전선언을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남생은 부친인 연개소문의 탈상을 치를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