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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가야 도성 조영 시기에 중국 남조 및 백제 등과의 비교를 통하여 가야 도성의 실체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가야가 도성을 조영하는 시기인 5~6세기대에 백제와 가야는 긴밀한 교섭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삼국시대에 중국 남조와 가장 교섭을 많이 한 나라가 백제라는 점에서 가야는 백제를 통하여 중국 도성에 대한 간접적인 정보를 얻었을 수 있다. 다만, 가야 여러 나라가 백제와 중국 남조 도성에 대한 직·간접적인 인식을 했더라도 그 수용 여부는 현지 사정에 따라 달랐을 것이기에 남조의 도성이 가야의 도성에 반영되었을 가능성은 미약하다. 백제도 중국 도성을 그대로 구현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백제보다 영역과 국력이 훨씬 약한 가야 여러 나라가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야는 소규모·초보적인 도성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중국 도성제에서 변용된 백제 도성제가 가야 환경에 맞추어 소규모화되면서 한 번 더 변용되었다는 점에서 가야 도성에서는 중국 남북조시대의 전형적인 도성제를 확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가야는 6세기 멸망할 때까지 통합되지 못하였기에 백제와 같은 정연한 대규모 도성은 확인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고대국가로 진입하기 직전 단계의 가야 여러 소국에 대한 왕성의 조사·연구는 동아시아 정치체의 사회발전단계 및 왕성의 변화과정의 연구를 위해서도 학술적인 의미가 적지 않을 것이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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