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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 김성일의 촉석루 제영시의 위상은 촉석루시사에서 규명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학봉 시의 차운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진주성에 내재한 문화적 기억 양상을 통해 삼장사의 성격을 규명함으로써 삼장사 논쟁의 해법을 아울러 찾고자 했다. 이는 학봉 시의 가치와 삼장사의 의미를 밝히는 새로운 시각인데, 본론에서 다룬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634년 촉석루 현판으로 게첨되었다고 하는 학봉 시는 여러 차운시를 창작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실제 1740년 이후 학봉 시의 차운은 12제 16수가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는 약 700년 촉석루시사에서 학봉 시가 작가 논쟁만큼이나 비중이 크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둘째, 학봉 시의 차운 중 영남삼장사를 제재로 한 지은 작가는 최흥원, 여동식, 이가순, 이진상 등이 있다. 반면에 1747년 영조의 명으로 최경회 치제가 거행되고,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서 지어진 최경회 행장에 최경회가 삼장시의 작가로 등장함으로써 삼장사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셋째, 삼장사 시가 게판되기 전에 이미 사용된 삼충(三忠), 삼장(三將), 삼절(三節) 등의 명칭은 후대로 내려올수록 호남 출신의 삼장사 용어로 수렴되었다. 넷째, 호남 출신의 삼장사는 삼충비(三忠碑)의 존재로 진주지역에 한층 각인되었다. 다섯째,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까지 지속되는 창렬사(彰烈祠) 제향에서 추모하는 삼장사는 호남 출신의 장수라는 사실이다. 진주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기억 매체의 통일을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촉석루일절」 시는 학봉이 창작한 것으로 간주하되, 역사적으로 진주성에 각인된 삼장사는 호남삼장사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표시는 필수 입력사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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