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자료 카테고리

전체 1
도서자료 1
학위논문 0
연속간행물·학술기사 0
멀티미디어 0
동영상 0
국회자료 0
특화자료 0

도서 앰블럼

전체 (1)
일반도서 (1)
E-BOOK (0)
고서 (0)
세미나자료 (0)
웹자료 (0)
전체 (0)
학위논문 (0)
전체 (0)
국내기사 (0)
국외기사 (0)
학술지·잡지 (0)
신문 (0)
전자저널 (0)
전체 (0)
오디오자료 (0)
전자매체 (0)
마이크로폼자료 (0)
지도/기타자료 (0)
전체 (0)
동영상자료 (0)
전체 (0)
외국법률번역DB (0)
국회회의록 (0)
국회의안정보 (0)
전체 (0)
표·그림DB (0)
지식공유 (0)

도서 앰블럼

전체 1
국내공공정책정보
국외공공정책정보
국회자료
전체 ()
정부기관 ()
지방자치단체 ()
공공기관 ()
싱크탱크 ()
국제기구 ()
전체 ()
정부기관 ()
의회기관 ()
싱크탱크 ()
국제기구 ()
전체 ()
국회의원정책자료 ()
입법기관자료 ()

검색결과

검색결과 (전체 1건)

검색결과제한

열기
자료명/저자사항
(배우 신성일,)시대를 위로하다 : 톱스타 신성일이 당신께 드리는 열정과 로망 / 신성일, 지승호 [공]지음 인기도
발행사항
파주 : 알마, 2009
청구기호
791.43028092 -9-3
자료실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형태사항
332 p. ; 23 cm
표준번호/부호
ISBN: 9788992525558
제어번호
MONO1200948962
주기사항
신성일의 본명은 "강신영"임

이용현황보기

이용현황 테이블로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1408139 791.43028092 -9-3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0001408140 791.43028092 -9-3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 제공)

    반백년 영화 인생 동안 무려 506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영화배우, 무비스타, 영화인 신성일. 자신의 인생과 한국 영화사를 어떤 거짓도 꾸밈도 없는 입말로 풀어놓았다. 그저 사생활에 대해 주절대고 ‘왕년의 영광’을 회고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은 지난 세기의 연대기와 풍속사를 담고 있으며, 1957년에서 21세기에 이르는 한국 영화사의 만화경을 담고 있다. 신성일은 오늘도 길 위에서 분주하다. 조명 밑은 아니지만 문화산업 발전, 영화박물관 건립을 위해 여전히 걷고 또 걷는다. 그의 걸음은 반백년의 연륜과 통찰을 오늘을 위해 쓰기 위한 노력이다.

    이 책에 대하여

    <스포츠동아>는 창간기념으로 한국의 유명인 100명에게 ‘역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스타’를 뽑아달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해서 2008년 3월 24일자 기사로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설문조사에서 신성일은 놀랍게도 공동 3위인 월드스타 비(정지훈)와 한류 열풍의 주역인 ‘욘사마’ 배용준의 12표에 5표 뒤진 7표로 5위를 차지했고, 안성기, 송강호를 제쳤다. 1위는 23표를 차지한 ‘가왕’ 조용필, 2위는 18표를 차지한 ‘문화 대통령’ 서태지였다. 그 인물들은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거나, 상당한 영향력이 있지만 신성일의 명성은 과거형이다. 그러나 1960~1970년대의 영화계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신성일이 역대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스타로 뽑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문을 표할지도 모른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은 “스타가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인 생명력에 있어 신성일은 서태지를 압도한다”고 말한다. 서태지는 1990년대를 자기 시대로 만들었지만, 현역으로 활동한 기간은 1집에서 4집을 발표하고 활동한 비교적 짧은 시간이었다. ‘가왕’ 조용필 역시 전성기를 굳이 꼽자면 1980년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10년이 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신성일은 1957년 영화사의 월급쟁이 배우(연출, 제작의 허드렛일을 모두 하는)로 시작해, 1962년 <아낌없이 주련다>, 1963년 <가정교사> <청춘교실>로 스타덤에 오르고, 1964년 <맨발의 청춘>으로 ‘신성일-엄앵란 스타 시스템’을 구축한 이래 매년 수십 편의 영화에 주연배우로 출연하게 된다. 그리고 전성기를 좀 지났다는 1970년대에도 <별들의 고향>으로 관객 36만 명을 동원하고, 1977년 <겨울여자>로 관객 49만 명을 동원했으며 2000년대까지도 영화에 출연했다. 동시에 제작 일선에서도 활동했다.
    앞서 박찬욱 감독이 말한 것처럼, 한국영화사, 한국현대문화사는 반백년 동안 신성일에게 정말 오래, 많이 기대왔다. 이 책 말미에 덧붙은 신성일의 출연·감독·제작 영화 목록 자체가 그 증거다. 그 목록은 1957년에서 21세기에 걸치는 한국영화사 주요 작품 목록이며, 동시에 유현목, 신상옥, 이만희, 김기영, 김수용, 김기덕, 정창화, 이형표, 임권택 감독 들의 작품 목록과도 상당히 겹친다. 한마디로 그의 이력이 곧 한국 현대 영화사와 겹치는 셈이다.

    이에 따라 신성일의 구술에는
    1)신필림이나 극동흥업에서 오늘에 이른 제작 시스템의 변천사
    2)한국에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의 탄생
    3)오랫동안 지속된 후시녹음 연출의 기술 조건 및 후시녹음 상영의 환경
    4)국가의 직접 검열 및 사회의 간접 검열 시스템
    5)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한국영화 수집까지 포함한, 1960년대 한국영화의 홍콩, 동남아 진출의 막후와 세부
    6)트로이카 1세대(문희, 남정임, 윤정희)와 트로이카 2세대(유지인, 정윤희, 장미희)의 회상,
    7)유현목, 김기영, 김기덕, 김수용, 이만희 감독 들의 현장 연출의 실제
    8)스타가 제자리를 지킬 수 없도록 한 정치권의 끊임없는 러브콜
    등 다채로운 증언, 사실, 연대기 들이 가득하다. 또한 1937년생의 성장과 사회 활동에 비친 지난 세기의 풍경은 그 자체로 흥미로운 풍속사, 사회사 자료이기도 하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다시 한 번 역사의 전환기에 서 있다. 문화 부문도 예외일 수가 없다. 영화 아이콘 신성일이 겪은 수많은 경험, 때로는 이를 악물고 지나온 고통의 여정을 통해 얻은 성찰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때다. 반세기 영화사 속에서 500편이 넘는 영화의 주연을 맡았던, 대기록을 남긴 배우, 영화인의 경험은 지금 우리 문화계와 영화계에 소중한 밀알로 남겨져야 할 것이다. 그가 한국 영화 세계화를 위해 국제영화제 현장을 돌며 얻은 경험, 배우 양성을 위해 추진했던 아카데미 운영 경험, 영화박물관 건립을 위한 노력 들은 그 자체로 값진 경험이며, 당장 이루지 못했을지언정 문화계와 영화계에 이정표가 되는 활동이었다. 이런 활동이 영화계뿐만 아니라 대중에 의해 이정표로 ‘재발견’될 때, 우리 문화는 비로소 유산을 하나 더 남길 수 있고, 자산을 하나 더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유산과 자산은 한 문화를 공유한 공동체의 ‘행복’과도 직결된다. 비틀스가 전 세계 음악팬을 행복하게 한 것 이상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의 신성일은 한국 대중에게 행복을 줬다. 영화 이력 내내 506편 작품의 주인공이었고, 한국 영화의 황금시대에 한 해 60여 편 영화의 주연을 맡으며 대중의 삶을 위로한 그의 공은 쉽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외국의 스타는 팬과 함께 늙어간다. 팬은 함께 늙어가는 스타로부터 지난 열광과는 또 다른 위로를 받는다. 이제 한국도 그만한 문화를 쌓을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더보기
  • 책속에서 (알라딘 제공)

    덕분에 멜로드라마지만 작품이 속도감을 가졌죠. 그래서 김수용 감독이 높은 평가를 받았어요. 이때도 윤정희 씨와 내가 같이했죠. 1966년과 1967년은 한참 문학작품들을 영화화했어요. 그때 영화법이 개정되어 우수 작품을 제작하면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수입쿼터를 주니까, ‘예술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좀 미흡하지만 ‘문예작품’이라는 이름을 붙인 작품들을 많이 만들었지요. 문학작품을 영화화한 것을 대개 문예작품이라고 일컫는데, 최고의 수준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했다 해도, 어느 정도의 수준은 됐었죠. ‘문예’라는 말은 일본에서 붙인 이름입니다. 그때는 문예작품을 많이 했어요. 김동리, 황순원, 김동인, 심훈, 김래성 등 한국 문학전집에 오르는, 이름 있는 작가의 작품은 대개 다 영화화했죠. 그 가운데 김동리 원작의 <까치소리>도 영화화했어요.”
    1장 절박했으므로 홀로 서다
    -고통과 시련의 청소년기를 건너

    “어느 날 아침 일어났더니, 당시 지방 일간지 가운데서 유력지였던 <영남일보> 사회면에 ‘과부 산통 계주, 야반도주'라는 머리기사와 함께 어머니 이름이 나온 거예요. […] 그 다음날인가 아주 불량한 사람들 서너 명이 집에 들어와서 자는 나를 발로 차며 깨웁디다. 얼굴을 맞고 코피가 터졌는데, 그 꼴로 집에서 도청까지 멱살을 잡혀서 끌려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1학기에 말입니다. 나는 어머니가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데, ‘엄마 찾아내라'고 때립니다. 엄청난 일을 당한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당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 - 독립적인 성격이고, 자수성가를 할 수 있었던 것이 어린 나이에 큰 시련을 경험한 탓도 있다고 보십니까?
    신 - 그렇죠. 어머니의 야반도주 이후에 빚쟁이들한테 시달리면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아 어떻게든 견뎌내고, 어떻게든 서울로 올라가야겠다, 대구를 떠나야겠다. 대구에서는 도저히 가망이 없다', 이런 생각이 절박했어요. 어린 나이잖아요. 어떤 일이든지 뚫고 나가야겠다는 의지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길러진 것 같아요. 그러고 난 다음 서울 올라와서도 대학 떨어지고, 방황하고 좀 헤매기도 하다가 호떡 장사까지 하게 됐는데요. 호떡 장사한 소리를 생전에 어머니한테 하면 ‘창피하게 그 얘기는 하지 마라' 그러셨어요. 나는 호떡 장사가 사회 활동이라면 활동이라고 봅니다.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잘났고, 좋은 학교 다니면서 잘났네, 잘났다 하던 놈이, 서울에서 제일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밑바닥 생활을 하는 청계천에서 두세 달 호떡 장사했던 경험, 그것이 자산이랄까 힘이 됐다고 생각해요.”
    5장 ‘만만한 호스티스’와 함께 추락한 한국 영화
    -통제와 검열의 시대를 살다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앞세워 ‘의무 제작’을 시켰습니다. 또 수입쿼터 제도는 이권이 엄청나게 개입된 정부 관리 제도였어요. 정부는 연간 외화 수입 한도를 40편으로 제한했습니다. [중략]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르고 골랐기 때문에 외국 작품은 정말 우수한 작품만 들어왔어요. 그런 판에 한국 영화는 계속 엄격한 검열을 당하는 겁니다. 시나리오 검열, 제작 전 사전 검열, 개봉 전 검열까지 삼중으로 검열을 당했으니 할 수 있는 작품이 없었어요. 게다가 검열을 부르는 사회 분위기도 있었어요. […] 교수라든지, 변호사라든지, 의사라든지. 이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조금이라도 비도덕적이고, 불미스러운 것을 다루면 항의가 들어와요. […] 사회적 지위가 낮은 직업군도 마찬가지였어요. 버스 차장을 다루자면 삥땅, 버스 회사에서 당하는 수모, 인권 문제 같은 게 나올 수밖에 없잖아요. 이런 문제를 다뤘다고 해서 버스 차장들이 데모를 했어요. 그렇게 영화를 못 찍게 하는 세상이었으니 영화를 할 길이 없었던 겁니다. 교수도 안 돼, 의사도 안 돼, 변호사도 안 돼, 버스 차장도 안 돼… 그러다 찾아낸 게, 항의할 리도 없고 아무 소리도 안 하는 직업군을 다루게 된 겁니다. 그게 호스티스란 말이죠. 그래서 호스티스 영화가 마구 쏟아져 나왔어요.”
    더보기

권호기사보기

권호기사 목록 테이블로 기사명, 저자명, 페이지, 원문, 기사목차 순으로 되어있습니다.
기사명 저자명 페이지 원문 기사목차
연속간행물 팝업 열기 연속간행물 팝업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