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을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 요시카와 고지로의 두보 강의 이용현황 표 -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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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책소개
궁핍한 시대 시인의 초상, 시성 두보! 거장 요시카와 고지로와 함께하는 두시 소요유!
중국의 고금을 통하여 가장 위대한 시인, 시성詩聖 두보(712~770). 그는 당대唐代 최고의 황금기인 현종 황제의 개원開元·천보天寶 연간을 불우한 서생으로 보내고, 안녹산의 반란 이후 혼돈의 세월을 처자를 이끌고 중국 서남부를 떠도는 불행한 가장으로 살다가, 호남의 배 위에서 쉰아홉 인생을 마감한다. 세계적인 중국문학자인 일본의 석학 요시카와 고지로吉川幸次郞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두보의 시는 자신의 불우와 불행, 슬픔과 괴로움에 그치지 않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온 백성이 겪는 슬픔과 괴로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분노와 노여움을 담아낸다. 두시의 위대함은 자연과 인생의 핵심을 찌르는 관찰-숙려-표현의 치밀함과 그것을 넘어서는 초월과 비약의 방향을 상호보완의 관계로 통일해낸 데에 있다. 또한, 두시는 시의 혁명이었다. 내용과 형식 모두, 두보는 중국의 고대?중세시와 근대시를 가르는 분수령이며, 가장 엄격한 운율을 지닌 시형 오언율시, 칠언율시의 완성자 역시 두보였다. 두시는 이후 천년 동안 모든 시인이 두보의 길을 걷게 할 만큼 강력한, 중국시의 완전한 전형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두보 사기私記 제1권』과 『두보 사기 속고續稿』, 그리고 교토 대학 문학부의 최종강연 「두보의 시론과 시」를 묶어 옮긴 것이다. “『두보 사기』는 두시를 더듬으며 두보의 전기를 말하고, 두보의 전기를 말하며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배경을 말하여, 시대를 그려내는 동시에 두시를 한 수 한 수 정밀하게 감상하려 한다. 즉 역사와 문학이 서로 교섭하고 지탱하며 세부적으로 어떻게 조합되어 가는지를 고려하면서, 대시인 두소릉杜少陵의 모습을 드러내보이려 한다.” 책 전체에 녹아 있는 저자의 “두시의 ‘특이한 기상’을 받아들이는 감수성과 이해력, 그리고 작품과 감상자가 주고받는 완급을 조절하는 힘”(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의 해설)은, 두시 읽기의 가장 훌륭한 안내서로 접할 일반 독자에게도 두시 연구의 한 모범으로 받아들일 전문가에게도, 대가의 풍모를 보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시는 두보에 이르러 고금의 모든 일이 다 갖추어졌다” 일찍이 중당中唐의 한유, 백거이에서 송宋의 소동파, 왕안석을 거쳐 현대의 호적과 노신에 이르기까지, 두보는 고금 제일의 시성으로 일컬어졌다. 일본 최고의 하이쿠俳句 가인歌人 바쇼芭蕉 또한 평생 『두자미杜子美 시집』의 애독자로 두시의 세계를 거닐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여서 고려의 이제현, 이색이 두시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한글 창제 직후인 세종~성종대에는 왕명에 의해 두보의 시 1,647편을 담은 최초의 국역시집 『두시언해』(『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의 번역이 진행되어 1481년에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두시언해』 서문에서 “시를 배우는 자들은 진실로 능히 두시로 모범을” 삼아야 한다고 쓴 조위曹偉는 두시를 이렇게 평했다. “두보가 성당盛唐 시대에 태어나 능히 막힌 곳을 뚫고 끊어내어 퇴락한 풍습을 떨치어 일으켰고 침착하고 온화하며 억양을 이루는 흥취로 힘써 음탕하고 요염하고 화사하고 사치스러운 습관을 제거했다. 난리를 만나 달아나고 숨는 시기에도 시절을 슬퍼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말이 지극한 정성에서 표출됐으며 충분忠憤의 격렬함이 족히 백대까지 솟구치고 진동시킬 만했다. 그 사람들의 착하고 악함을 권장하고 징계하는 것이 실제 시경詩經 삼백 편과 표리를 이루었고 사실을 지적하여 진술하는 점은 시사詩史라고 부를 수 있다.”(윤석민·권면주·유승섭, 『쉽게 읽는 중각두시언해』, 박이정, 5쪽) 그리고 1632년에 나온 『중각重刻두시언해』 서문을 쓴 장유張維의 평은 이렇다. “시는 두보에 이르러 고금의 모든 일이 다 갖추어졌다. 갖추어진 소재가 지극히 풍부하고, 입의立意가 매우 깊으며, 조어造語는 그 변화를 다했으니, 옛사람들이 가슴속에 국자감의 실력이 없으면 두시를 볼 수 없다 한 말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위의 책, 2쪽)
‘한 자도 내력 없는 것이 없는’ 두시, 그리고 ‘시로 쓴 역사’ 장유의 바로 다음 문장을 보자. “두시를 주해한 사람이 1천가라고 말한 것은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그러나 두보시의 깊은 뜻과 오묘한 말에 대해 명백히 밝힌 이는 적으니, 두시를 읽는 이들이 이 점을 문제시한 게 오래되었다.” 그래서 『두시언해』가 필요했던 것이겠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가장 근본적으로는 두시 자체가 『시경』과 한·위·육조 시대의 시문 모음집 『문선文選』 30권을 시어들의 원천으로 삼고 있어 ‘한 자도 내력이 없는 것이 없’으며, 또한 종래의 시와 산문의 형식과 내용을 뛰어넘어 시세계의 혁명을 이뤄낸 ‘시로 쓴 역사[詩史]’라는 점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두보의 시를 접하고 스물한 살에 두시 전부를 읽은 뒤로 평생을 두보를 중심으로 한 중국문학 연구로 보냈으며 고금의 문헌에 해박하고 고증에 뛰어났던 저자는, 그 점에서, 특히 『문선文選』의 어휘들과 관련하여, 지금까지의 두시 주석들이 어느 것이나 불완전함을 면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깊이 다루지 못한 부분을 포함하여 두시 전체를 다시 번역해내는 『두보시주詩注』 집필의 의욕을 불태운다.
미완의 작업으로 그친 두시 읽기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자는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쓴 1960년대 후반 이후로 198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보 사기 제1권』의 후속작업을 진행하지 못했고, 『두보시주』 또한 저자 사후의 유고로 묶일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1968년에 출간된 전집 12권 두보편 ‘자발自跋’에 이렇게 썼다. “제2권은 적군賊軍에 의한 감금, 그리고 탈출이라는, 두보의 전기가 가장 소설적인 시기로 접어들 터이다. 붓을 들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낸 것은 문학의 성장과 환경의 격변의 관계, 그것이 두보 같은 대작가에게는 얼마만큼 상관이 있었는지 하는 대목에서 생각이 잘 풀리지 않은 데에도 이유가 있다. 또한 환경에 대한 자료, 그리고 그 자료를 해석하는 일이 힘에 부친다는 이유도 있다.…… 내 작업이 이런저런 방향에서 나 자신의 예상을 배반하여 미완성인 부분이 많다는 것은 이 전집의 여러 권에 나타나 있을 터인데, 이 두보의 권卷은 특히 그러할 것이다. 두보는 너무도 위대하고, 그럼에도 두보에 대한 내 집착이 깊기 때문이라고 이해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다행이겠다.” 그리하여 두보 평전과 두시 해설을 아우르는 저자의 야심적인 작업은 두보 나이 마흔여섯 무렵에서 멈추고 만다. 1,500수가 넘게 전해지는 두시 가운데 이 책에 담긴 시가 부분적으로 다룬 것을 포함해도 100여 편에 지나지 않으며, 두보의 시가 절정에 이른 말년의 시들이 많이 실리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두시 이해의 깊이만큼이나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그나마 한국어판이 나와 있는 저자의 『당시 읽기』에 두시 15편의 해설이 실려 있다).
시절을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 이 책의 제목 ‘시절을 슬퍼하여 꽃도 눈물 흘리고’는 두보의 명시 「춘망春望」에서 뽑은 것이다. 그 유명한 ‘나라는 부서졌는데 산하는 남아 있고國破山河在, 성 안에 봄이 와서 초목이 우거졌네城春草木深’로 시작되는 이 오언율시의 명작은, 현종 황제의 태평성대가 안녹산의 난을 계기로 혼돈의 나락으로 굴러떨어지던 시기, 황제를 찾아 떠나려다 반군에게 붙들려 구금당해 있던 두보가 역시 반군에게 점령당한 장안성에서 지은 것이다. 위 구절의 바로 다음이 ‘시절을 생각하니 꽃이 눈물을 뿌리고感時花?淚, 헤어짐을 한하니 새가 마음을 놀래킨다恨別鳥驚心’는 구절이다. “두보가 시인의 양심으로서 임무로 삼은 것은 광범위하게 사람들을 덮쳐오는 불행을, 널리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사람들을 대신해서 노래하는 일이었다.” 두보는 부조리한 세상에서 거의 평생을 불우와 불행,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살면서, ‘그대의 뜻을 남들은 알지 못하나니君意人莫知, 인간 세상은 밤에 고요하도다人間夜寥?’(「밤에 허십일이 시를 외우는 것을 듣고 아끼는 마음이 들어 짓다夜聽許十一誦詩愛而有作」)라고 읊고 ‘이 몸 술 다 마시고 돌아갈 곳 없어此身飮罷無歸處, 홀로 창망히 서서 스스로 시를 읊네獨立蒼茫自?詩’(「낙유원에서 노래하다樂遊園歌」)라고 읊으며 고독한 시인의 길을 걸어갔지만, 그는 그리하여 “참으로 시간의 제약을 넘어서 영원히 인류의 마음에 있는 것을, 인류의 대표자로서 노래한” 고금에 유례가 없는 위대한 시인으로 빛나고 있다. 이 책은, 위대한 시인 두보의 삶과 시로 통하는, 그윽하고 진득한 안내서다.
책속에서
두보 시의 위대함을 내용적으로 혹은 사상적으로 파악한다면, ‘인간은 어떻게 존재해야 할 것인가’라는 인식의 올바름이라는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두보가 품었던 인간관(혹은 세계관)을 결론적으로 잘 보여주는 작품은 아주 만년에 지은 오언율시 「추야秋野」의 한 연입니다.
易識浮生理, 뜬 구름 같은 삶의 이치 알기 쉽지만, 難敎一物違. 한 사물로 하여금 어긋나게 하기는 어렵네.
부생浮生, 즉 이래저래 불안정한 것이 인생이지만, 불안정한 인생의 ‘도리’라는 것은 인식하기 어렵지 않다, 아니 인식하기 쉬운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일물一物, 그러니까 단 하나의 존재라도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 있는 것은 견디기 힘들다. 만약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면 모종의 저항감을 느끼는, 그것이야말로 부생의 도리라는 말입니다만, 모든 존재가 행복하게 조화를 이루어 존재하는 그러한 세계가 두보의 이상이었습니다. 두보의 모든 시의 근저에는 응당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끝없이 주장하고, 또 그 실현을 방해하는 다양한 요소에 끝없이 항의하는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 (14~15쪽)
그러한 시로서의 위대함을 두보는 두 가지 방향으로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파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치밀함입니다. 정밀함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시가 소재를 통해 감동을 낳는다는 사실은 새삼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소재를 통해 감동을 낳기 위해서 우선 소재의 윤곽을 이루는 것을 또렷하게, 치밀하게, 정확하게 포착하여 감동의 기초를 확실히 하려는 성질이 우선 있습니다. 두보 시는 본래부터 격렬한 시입니다. 모든 존재의 조화를 얻은 공존을 바란 그는 정치사상 면에서는 늘 현실개혁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는 늘 격렬합니다. 그러나 격렬한 언어가 갖기 쉬운 조분粗?함, 거친 면은 없습니다. 늘 치밀합니다. 이것은 우선 인간의 사실이나 자연의 사실을 섬세한 부분까지 관찰하려는 숙시熟視, 끝까지 관찰한 것을 마음속에서 곱씹는 숙려熟慮, 그리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는 데에서는 매우 치밀한 언어로 나타납니다. 표현 면에서의 치밀함은 이지理智에 의한 계산 또한 거부하지 않는 것이었고, 그런 까닭에 그는 대구對句의 명인입니다. - (15쪽)
그런데 지금까지 말씀드린 두보시의 치밀함, 이것은 두보시에 얼마간 접한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대상으로 삼은 소재의 윤곽을 분명하게 잡아내는 방향입니다. 그런데 두보시에는 또 하나의 방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의 배후에 있는 것에 닿으려는 방향입니다. 이야기를 간단히 하기 위해, 그것을 초월의 방향 혹은 비약의 방향이라 부르겠습니다. - (26-27쪽)
여기서 두보는 벗 이백의 천재로도 열지 못했던 신경지를 개척하게 되었다. 또한 그것은 다만 두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 고대시를 근세시로 전환시키는 대전기이기도 했다. 이백과 두보 모두 대시인이다. 그러나 이백은 두보에 비하면, 더 단순하고 덜 혁명적인 시인이다. 장년의 두보는 세계의 본질을 자세히 바라보고 거기서 찾아낸 새로운 것을 종횡으로 노래하려 했고, 그런 그에게 가장 만족스러운 시형은 칠언가행, 즉 칠언고시였으리라 생각된다. 생각건대 그것은 중국 시형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시형이기 때문이다. 이 자유로운 시형을 통해 두보는 다양한 것을 노래했다. 먼저 노래한 것은 당시의 세상이었다. 천보 시대는 개원 시대와 달리, 세상은 이미 상승의 꼭짓점을 지나 하강의 길을 걷고 있었다는 사실은 앞장에서 설명한 대로이다. 어딘가 모르게 태평의 영속을 위협하는 듯한 사상事象이 쌓여가고 있었다. ‘악을 미워하여 강장을 품은’ 두보가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두보는 이 칠언고시 형태로 그러한 사상 몇 갠가를 노래하고 있다. 출정한 병사의 노고를 노래한 시에는 「병거행兵車行」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부지런히 사방의 오랑캐를 경략經略했던 현종 대에, 농민들은 종종 국경 경비를 위해 징집당했다. ‘병거행’의 ‘행行’은 노래[歌曲]라는 뜻이다. 뒤에 나오는 ‘○○행’ 또한 마찬가지이다. - (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