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소녀 바이올리니스트의 유괴 사건, 이에 휘말려 든 탐정 당신은 이 충격적 결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사라진 가족 문제로 얘기하고 싶다는 한 통의 의뢰 전화. 하지만 탐정 사와자키를 만난 의뢰인은 느닷없이 6천만 엔을 그에게 안겨주며 하소연한다. 제발 딸을 돌려달라고. 영문도 모르는 사이에 유괴 사건에 얽혀버린 사와자키는 경찰서로 끌려가고, 유괴범의 요구로 돈 가방을 전달하는 역할마저 맡게 된다. 하지만 몸값을 전달하던 중 불량배에게 폭행당하고 돈은 증발해버리는데……. 갑작스레 꼬이는 사건, 깊어지는 경찰의 의심 속에 사와자키는 유괴된 소녀의 외삼촌으로부터 어떤 의뢰를 받게 된다.
하드보일드 스타일과 고전 미스터리의 퍼즐이 한데 엮여 탄생한 걸작!
일본 하드보일드의 새 지평을 열다
20세기 일본 최고의 하드보일드, 하라 료의 《내가 죽인 소녀》가 비채에서 출간됐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서 처음 모습을 선보인 탐정 사와자키가 다시 등장하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으로, 야마모토 슈고로상 결선에 올라 아쉽게 탈락했던 전작의 아쉬움을 보상하듯, 당당히 제102회 나오키상을 수상했다.
‘하드보일드’는 사전적 의미로 계란 완숙(Hard-Boiled)를 뜻한다. 흔히 거칠고 선이 굵은 주인공이 주인공이 등장해 액션이 주가 되는 장르로 여겨지고 있지만, 추리소설 안에서 ‘하드보일드’는 여타 서브 장르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하나의 스타일이다. 메마르고 냉담한 문체, 무뚝뚝한 탐정, 사건의 흐름은 등장인물의 행동으로 연결되고 독자는 투덜대는 탐정과 눈높이를 맞춰 타자(他者)의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본다. 헤밍웨이 특유의 건조함에서 비롯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은 대실 해미트, 레이먼드 챈들러, 로스 맥도널드로 이어지며 현대 추리소설의 한 축을 이뤘다.
그 동안 일본 하드보일드 하면 ‘반 영웅적’ 기질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해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다소 과격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하라 료가 등장한 이후 일본추리소설사에서 하드보일드의 의미는 조금 달라졌다. 서른 살 이후 해외 미스터리에 푹 빠져버린 하라 료는 특히 레이먼드 챈들러에 깊이 매료됐다. 세계를 자신의 언어로 바꿔버리는 챈들러의 문장과 그가 탄생시킨, 현대의 기사(騎士) 필립 말로는 중년에 접어든 한 재즈피아니스트에게 깊은 감동과 간절한 동경을 가져다주었다. 하라 료는 이후 모든 일을 정리하고 귀향, 오로지 집필에만 몰두한다. 일본 하드보일드의 걸작으로 자리매김한 첫 작품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는 그렇게 탄생했고, 그로부터 1년 뒤 훗날 ‘나오키상’이라는 대중 소설의 지표를 통해 그 가치를 인정받는, 걸작 《내가 죽인 소녀》가 출간된다.
줄거리: 사와자키 유괴 사건에 휘말리다
중년의 탐정 사와자키는 번화한 도쿄 도심의 그늘에 위치한 작은 사무실, 와타나베 탐정사무소를 운영한다. 처음에는 둘이 시작한 사무소였지만, 은퇴 경찰이자 동업자인 와타나베는 대량의 마약을 폭력조직으로부터 빼돌리고 현재 도피중인 상태로, 잊을만하면 가끔씩 소식을 적은 전단지를 종이비행기로 접어 근황을 전할 뿐이다.
어느 날 사와자키는 행방불명된 가족에 대한 논의를 하고 싶다는 한 통의 의뢰 전화를 받고 의뢰인의 집을 방문한다. 하지만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뜻밖의 상황에 휘말리게 된다. 의뢰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사와자키를 유괴범의 공범이라고 생각하고, 6천만 엔이라는 몸값을 안겨주며 딸을 돌려달라고 하소연한다. 잠복했던 형사들에게 붙잡힌 사와자키는 집요한 취조를 당하게 되고 이 모든 것이 유괴범이 파놓은 이상한 계략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겨우 의심을 벗게 된 사와자키는 유괴범의 지목으로 몸값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하지만 몸값을 전달하던 중 불량배에게 폭행을 당하고 몸값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돈은 사라지고 유괴된 천재 소녀 바이올리니스트는 아직도 풀려나지 않은 상황. 경찰의 곱지 않은 시선이 더해지는 가운데, 사와자키는 유괴된 소녀의 외삼촌에게 어떤 의뢰를 받게 되고, 어느 폐공장의 하수구에서 참혹하게 부패한 소녀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는데…….
추리소설의 모든 스타일을 만족시키다
작가 하라 료는 자신의 글과 스타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 적이 있다.
“나에게 있어 하드보일드는 오직 문체(文體)의 문제입니다. 챈들러나 해미트라도 잘 쓰지 못했다면 그건 하드보일드가 아닙니다.”
19년 동안 단 여섯 권의 작품만 발표할 만큼, 과작 작가로 유명한 하라 료는 글에 공을 들이기로 유명하다. 그 긴 기간 내내 ‘언제나 쓰고 있다’라고 말할 정도이니, 글에 대한 연마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그만큼, 《내가 죽인 소녀》는 단단하고 밀도 높은 문장으로 진행된다. 레이먼드 챈들러에 비교될 만큼 독창적인 비유, 하나의 장면을 설명할 때조차 오감을 모두 이용하는 능수능란함, 등장인물의 뛰어난 조형과 대사의 여운 등 그 어떤 일본 추리소설과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격조를 느낄 수 있다. 스타일의 완성도뿐 아니라 추리소설적인 완성도 또한 흠잡을 곳이 없다. 하드보일드 작품은 리얼리티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추리소설적인 즐거움 즉, 빈약한 반전이 지적되곤 한다. 하지만 《내가 죽인 소녀》의 결말은 충격적이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갑작스럽게 뭔가에 휘감기듯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전개되는 유괴 사건은 사와자키의 단독 수사와 경찰의 미덥지 못한 수사가 교차되면서 서서히 정체를 드러낸다. 긴 기다림 뒤에 사와자키의 마음속에 감춰진 추리가 펼쳐지고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 독자는 그 진상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죽인 소녀》는 추리소설이 갖춰야 할 모든 미덕을 두루 만족하고 있다. 하드보일드라는 장르적 한계를 극복하고 일본 대중소설의 정점을 찍은 걸작. 일본 미스터리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는 결코 과장되지 않은 듯하다.
시리즈의 전작과 같이 《내가 죽은 소녀》 말미에도 에필로그를 대신한 단편 한 편이 덧붙어 있다. <한 남자의 신원 조사>라는 단편을 통해 작가 하라 료와 탐정 사와자키가 어떻게 서로를 알게 됐는지 확인할 수 있다.
책속에서
‘이게 마지막 기회입니다.’ ‘아, 다행이군. 정말 다행이야. 기도하는 심정으로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소.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사야카만 무사히--.’ ‘그러면 우선 그 입부터 다무세요. 쓸데없는 소리를 할 시간이 없습니다. 오늘밤 11시 정각에 간파치 길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 ‘킹 타이거’ 다카이도 분점으로 6천만 엔을 가지고 나올 것. 알겠습니까?’ ‘잠깐만……다카이도에 있는 킹 타이거?’ 마카베가 메모를 하는 기척이 났다. ‘그리고 이번 건은 절대 경찰이 관여하지 않게 할 것. 만약 조금이라고 그런 기미가 보이면 거래는 바로 취소됩니다. 이번에도 그러면 진짜 우리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겁니다.’ ‘알았소. 절대 그런 일은 없도록 하겠소. 그 레스토랑에는 반드시 나 혼자 가지.’ ‘누가 당신에게 오라고 했나요?’ ‘예? 무슨 소리요?’ ‘6천만 엔을 운반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와타나베 탐정사무소에서 왔던 남자입니다.’ 그제야 내가 왜 여기 있는지를 이해했다. ‘뭐라고? 하지만 그 사람은 당신들과 한패가 아니라고 했잖소. 만약 그 사람이 그런 역할을 거절한다면 어쩌지?’ ‘설득하세요. 딸의 목숨이 걸려 있어요.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내 전 재산에 빚을 내서 보탠 6천만 엔이나 되는 돈을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소.’ ‘당신 재산이라고? 그건 이제 우리 돈이지. 안 그래요? 아니면 당신은 그 돈을 넘겨줄 생각은 없고 경찰과 뭔가 계략이라도 꾸미고 있는 건가?’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절대 그렇지 않소.’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