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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저자사항
예수와 묵자 : 문익환 기세춘 홍근수의 논쟁 / 문익환 ; 기세춘 ; 홍근수 지음 인기도
발행사항
서울 : 바이북스, 2009
청구기호
261.295 -9-1
자료실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형태사항
362 p. ; 23 cm
표준번호/부호
ISBN: 9788992467339
제어번호
MONO1200997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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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부 공자의 하느님 묵자의 하느님

제1장 요순과 공자의 하느님 신앙

1절_하느님天帝,上帝

2절_제정일치

3절_전란의 참상과 제정의 문란

4절_유물론과 인본주의

5절_경신하되 원신하라

6절_지신,농신,여신

제2장 묵자의 해방신 하느님

1절_묵자는 누구인가?

2절_묵자의 정치사상과 사회사상

3절_묵자의 지상천국

4절_묵자의 하느님 모습

5절_묵자와 예수

제2부 문익환 목사의 옥중편지

1절_예수와 묵자는 쌍둥이 같다

2절_평등,평화사상의 뿌리

3절_전쟁신과 평화의 신

4절_선악과와 생명나무

제3부 존경하는 문익환 목사님께

1절_묵자와 예수의 하느님은 동의족의 하느님이다

2절_동이족과 수메르족은 한 뿌리

3절_인성은 선도 악도 아닌 백지이다

4절_예수는 노예제도에 대해 침묵했다

5절_하느님은 질투와 전쟁신이 아니다

6절_묵자는 민중해방 투사였다

7절_묵자의 반전운동은 하느님 나라 운동

8절_평등,평화사상은 수메르의 전통이다

9절_예수는 평화의 하느님을 부활시키러 오셨다

제4부 홍근수 목사의 옥중편지

1절_진보적 사상가, 운동가인 묵자

2절_오늘의 교회는 반통일 세력이다

제5부 존경하는 홍근수 목사님께

1절_종말론적인 회개가 요구되고 있다

2절_우리 조상들도 하늘나라에 갔을 것이다

3절_현대문명은 종교개혁을 요구한다

제6부 홍근수 목사의 반론

1절_시작하는 말

2절_ 묵자와 예수의 유사점

3절_기세춘 선생의 예수론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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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현황 테이블로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로 구성 되어있습니다.
등록번호 청구기호 권별정보 자료실 이용여부
0001475471 261.295 -9-1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0001475472 261.295 -9-1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이용가능
  •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 제공)

    평화.평등사상을 전파했던 예수와 묵자를 되돌아보고 현실의 종교 상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책. 예수와 묵자의 하느님은 하나같이 평화와 민중해방의 하느님이었으며, 인류 보편의 유일신이었다. 그렇기에 고 문익환 목사는 “예수와 묵자는 한 그루에서 나온 두 가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평화의 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기독교가 현실에서는 제 기능을 못 하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평화의 신 하느님의 본래 모습을 복원해야 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예수의 하느님과 묵자의 하느님을 비교하며 진정한 평화의 하느님의 모습을 되짚어본다.

    15년 만에 다시 세상으로

    『예수와 묵자』가 처음 세상에 선을 보였던 것은 15년 전이다. 1992년 기세춘 선생의 『묵자, 천하에 남이란 없다』가 출간되었는데, 그 책을 고 문익환 목사께서 옥중에서 읽고 기세춘 선생과 편지로 왕래하며 토론한 것이 『예수와 묵자』의 발단이 되었다. 후에 그 편지글에 기세춘 선생이 일반 대중에게는 생소한 묵자의 사상을 정리해 넣고, 뒤늦게 토론에 참한 홍근수 목사의 반론을 덧붙여 1994년 『예수와 묵자』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책의 운명은 순탄하지가 못해서, 기독교계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출간 1년 만에 절판되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이 예수와 묵자를 비교하고, 묵자의 하느님에서 예수의 하느님의 원형을 찾으며, 현실의 기독교를 비판하는 파격적인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저자 중 한 분인 문익환 목사는 그분을 흠모하는 이들의 마음속엔 여전히 살아계시나 이미 고인이 되신 지 오래고, 기세춘 선생과 홍근수 목사는 이제 칠십대의 노인이 되었다. 15년은 긴 세월이었다. 하지만 현실의 기독교는 당시의 문제들을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해결은커녕 더 큰 문제들이 여기저기서 불거져 나오고 있다.
    이 책이 그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수와 묵자의 사상은 그저 닮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유사하다. 책의 저자들도 예수와 묵자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는 조금씩 차이를 보이지만 그 유사성에 있어서는 대체로 일치된 의견을 제시한다. 그렇다면 묵자의 사상이 예수의 하느님의 본래 모습을 복원하고 현실 기독교를 개혁하는 데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책은 그런 바람으로 15년 만에 다시 태어났다. 본래 묵자의 사상을 소개했던 앞부분은 묵자의 하느님 사상을 중심으로 새롭게 손보았고, 당시 오갔던 서간 부분은 저자들의 생생한 숨결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 되도록 수정을 거치지 않았다.

    평화의 하느님 논쟁

    모세의 신 야훼는 이스라엘 민족의 부족신으로 인류 보편의 유일신이 아닌 단일신이었다. 그러한 야훼가 예수에 이르러 인류 보편의 평화의 신 하느님의 모습을 갖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고 문익환 목사는 모세의 야훼는 민족의 해방신이며, 이스라엘의 전통에 평화의 정신이 내재하여 있었고, 예수는 그 전통에 서서 새로운 조명을 비춘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기세춘 선생은 모세의 야훼는 유목민의 전쟁신이며, 평화 사상은 유목민의 전통이 아닌 수메르의 전통이며, 예수의 평화의 하느님은 수메르와 동이족의 전통을 이은 묵자의 하느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론한다. 이에 대해 홍근수 목사는 묵자가 예수보다 500년이나 앞선 시대의 인물이고, 묵자의 하느님과 예수의 하느님의 유사성을 인정하지만 고대의 문화 교류를 확인할 바가 없고, 예수가 묵자의 영향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고 반론한다.
    또 기세춘 선생은 예수와 묵자의 몇 가지 차이점을 지적하기도 하는데, 고 문익환 목사는 보기에 따라서는 그것들은 다른 점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홍근수 목사 역시 기세춘 선생의 예수 이해가 현실 기독교인들의 왜곡된, 혹은 상식적인 예수관에 기대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그것들은 오히려 유사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이들은 예수의 평화 사상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예수와 묵자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이 과연 차이점인가 유사점인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와 묵자의 하느님은 하나같이 평화와 평등의 하느님이며, 그 본질이 생명 사랑이라는 점이다.
    고 문익환 목사는 예수와 묵자, 거기에 석가여래까지 포함하여 “한 그루에서 뻗은 세 가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들의 말씀이 모두 생명에서 만난다고 강조한다.

    무엇이 선이고 악이냐는 것을 판가름하는 도덕과, 무엇이 생명에 이로우냐 해로우냐를 가리는 지혜는 분명히 다른 차원에 속하지요. 그러면서도 이 두 세계가 하나로 통일되지요. 묵자는 그것을 “의義는 이利다”라는 공식으로 표현한 것 아닙니까? 그 만나는 자리가 천륜과 인륜이 만나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생명이지요. …… 예수가 도덕과 지혜가 하나라는 걸 말한 것은 그가 광야에서 받은 첫째 시험 답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말이 그 답안이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내용은 곧 의인 거죠. 그렇다고 ‘빵으로 사는 나’와 ‘의로 사는 나’가 따로 있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먹을 것, 입을 걸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의로운 통치를 구하는 것이 모든 것에 우선하는 일이라는 것이었거든요.
    -본문 중, 문익환

    묵자의 하느님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보여준 모습이 어떠했든 예수의 하느님이 평화의 신이며, 그 교리가 생명 사랑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묵자의 하느님은 어떠한 모습이기에 묵자와 예수가 쌍둥이처럼 닮았다고 하는 것인가? 묵자의 하느님 사상을 엿보기 위한 글 몇 가지를 소개한다.

    ·「법의法儀」
    천하의 크고 작은 모든 나라는 모두 하느님의 고을이다. 사람은 어린이나 어른이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모두 똑같은 하느님의 백성이다.
    今天下 無小大國 皆天之邑也. 人無幼長貴賤 皆天之臣也.

    하느님은 의를 바라고 불의를 미워한다. 그래서 천하 백성을 이끌고 의로움을 힘쓰면 곧 하느님이 바라는 것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이 바라는 의를 행하면 하느님도 우리가 바라는 것을 해주신다.
    天欲義而惡不義. 然則率天下之百姓 以從事於義 則我乃爲天之所欲也. 我爲天之所欲 天亦爲我所欲.

    하느님이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하고 이롭게 해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느님은 사람을 두루 보전하고 두루 평등하게 먹여주기 때문이다.
    奚以知天兼而愛之 兼而利之也. 以其兼而有之 兼而食之也.

    ·「천지天志」 상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평등주의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차별주의다. 평등주의 정치는 의로운 정치요, 차별주의 정치는 폭력정치다.
    順天之意者兼也 反天之意者別也. 兼之爲道也義正 別之爲道也力正.

    ·「천지天志」 중
    지금 하늘은 천하를 평등하게 아울러 그들을 사랑하고 만물을 서로서로 자라게 하여 이롭게 하고 있다. 털끝 하나라도 하늘의 하심이 아닌 것은 없으며 백성들은 그것을 얻어 이롭게 하는 것인즉 참으로 크다 할 것이다.
    今夫天兼天下而愛之 ?遂萬物以利之 若豪之末 非天之所爲也 而民得而利之 則可謂否矣.

    하느님의 뜻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공격하고 큰 가문이 작은 가문을 어지럽히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고 다수가 소수를 폭압하고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고 귀한 자가 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天之意 不欲大國之攻小國也 大家之亂小家也 强之暴寡 詐之謀愚 貴之傲賤 此天之所不欲也.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힘을 가진 자는 서로 도와주고 도리를 가진 자는 서로 가르쳐 인도하고 재물을 가진 자는 서로 나누어 주기를 바란다.
    欲人之有力相營 有道相敎 有財相分也.

    위의 짧은 예문 몇 가지에서 보듯 묵자의 하느님은 평화와 평등의 하느님이었으며 민중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었다. 기세춘 선생은 묵자의 하느님의 특징을 민중해방의 구세주, 조물주, 유일신, 인격신, 인간을 자주하게 하는 신, 강림하는 신, 사랑의 신, 정의의 신, 가치의 근원, 평등의 신, 평화의 신 등으로 정리하고 있다. 예수의 하느님과 다른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닮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갈등을 넘어 화합으로

    인류의 선조들이 사냥을 하거나 목축을 하거나 어떤 곳에서는 농사를 지었거나 또는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았는데 그것을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하늘에서 내려와 자기들을 낳았다고 생각하는 사냥꾼이나, 신은 동물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는 목동이나, 사람은 하느님이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농사꾼이나, 사람은 알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어부의 생각은 모두 자연스런 것일 뿐 누구 생각은 옳고 누구 생각은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본문 중, 기세춘

    말했듯 예수의 하느님은 평화와 평등의 하느님이었으며, 민중해방과 생명 사랑의 하느님이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기독교 상황은 어떠한가? 같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기독교 내에서도 수없이 많은 종파를 갈라 서로 자기가 옳다며 상대를 배척한다. 또한 교회는 사랑의 교리를 실천하기보다 외적 성장에 열을 올린다. 교리를 전하고 죄를 회개하는 성전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기업인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모든 종파가 그러한 것은 아니며 모든 교회가 그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풍토가 만연해 있음을 부인하기란 쉽지 않다.
    이러한 배타주의와 물신주의는 대체 어디서 연원한 것일까? 예수의 하느님은 평화와 평등의 하느님이었으므로 분명 그 연원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평화의 하느님을 복원하고 본래의 기독교 정신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곳곳에 만연한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화해와 평화의 씨앗을 심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 예수와 묵자가 한목소리로 전한 그 평화의 메시지에 귀 기울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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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속에서 (알라딘 제공)

    [P.93] 묵자의 사상을 한마디로 겸애설이라고 한다. 이는 정곡을 찌르는 적합성을 지니고 있어 특히 묵자는 하느님의 사도로서 하느님의 뜻이 바로 ‘겸애’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묵자 사상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P. 130] 특히 묵자는 인간이란 모두가 다같이 하느님의 자손 즉 천손으로 생각한다. 즉 만민은 누구나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단군신화나 후직신화와 유사하며 특히 동이족의 인내천 및 홍익인간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P. 147] 묵자의 하느님은 모세의 야훼처럼 전쟁영웅이 아니고 오히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바라는 인류 보편의 자비로운 신이다. 이 점에서 서양의 신 야훼와는 다르다. 대체로 인류 보편신은 평화의 신이고 부족신은 전쟁신이다. 부족신은 다른 부족이 쳐들어온다는 적대적 상상력으로 적국과 타인과 다른 신을 사탄과 그의 자식들로서 증오하도록 심리적 구조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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