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권 아가멤논이 주요 지휘관들을 깨워 모으다 ㅣ 정탐꾼을 파견하기로 결정하다 ㅣ 돌론과 마주치다 ㅣ 레소스의 진영을 기습하다 ㅣ 두 정탐꾼이 귀환하다
IV. 전투 셋째 날: 여섯 번의 진퇴 11권 셋째 날 전투 시작 ㅣ 아가멤논이 큰 공을 세우고 부상당하다 ㅣ 헥토르가 반격을 가하고 전세의 균형이 이루어지다 ㅣ 디오메데스의 부상 ㅣ 오뒷세우스의 부상 ㅣ 마카온과 에우뤼퓔로스의 부상 ㅣ 파트로클로스, 아킬레우스의 명으로 네스토르와 에우뤼퓔로스를 만나다
12권 트로이아군이 호를 건너다 ㅣ 열린 문으로 아시오스가 쳐들어가다 ㅣ 방벽 전투 ㅣ 사르페돈이 방벽을 부수다
13권 포세이돈이 희랍군을 격려하다 ㅣ 희랍군의 분발 ㅣ 이도메네우스의 수훈기 ㅣ 왼쪽 전투가 균형을 이루다 ㅣ 트로이아군이 중앙에 집결하다
14권 부상당한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격려하기로 하다 ㅣ 헤라가 제우스를 속여 잠들게 하다 ㅣ 희랍군 전사들이 무장을 서로 바꾸다 ㅣ 전세가 반전되어 트로이아군이 퇴각하다
15권 제우스가 깨어나 자기 계획을 밝히다 ㅣ 희랍군에게 불리하게 전세가 반전하다 ㅣ 희랍군이 배 앞까지 밀린 후 균형을 이루다 ㅣ 막사 옆에서의 전투
16권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를 설득하다 ㅣ 파트로클로스가 뮈르미돈 사람들을 이끌고 출전하다 ㅣ 전세가 트로이아에 불리하게 반전하다 ㅣ 파트로클로스가 수훈을 세우기 시작하다 ㅣ 파트로클로스가 사르페돈을 쓰러뜨리다 ㅣ 사르페돈의 시신을 놓고 쟁탈전을 벌이다 ㅣ 파트로클로스가 성벽을 공격하다 ㅣ 파트로클로스와 헥토르의 대결
17권 행동1 : 메넬라오스가 에우포르보스를 쓰러뜨리다 ㅣ 행동2 : 메넬라오스가 아이아스를 불러오다 ㅣ 파트로클로스의 마부가 전투에 가담하다 ㅣ 행동3 : 안틸로코스가 아킬레우스에게 죽음을 알리러 달려가다 ㅣ 희랍군이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들고 후퇴하다
18권 아킬레우스에게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 전해지다 ㅣ 아킬레우스가 고함을 질러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구하다 ㅣ 풀뤼다마스가 퇴각을 제안하나 헥토르가 거절하다 ㅣ 아킬레우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슬퍼하다 ㅣ 헤파이스토스가 아킬레우스를 위해 새로운 무장을 만들다
V. 전투 넷째 날: 아킬레우스의 날 19권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과 화해하다 ㅣ 브리세이스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슬퍼하다 ㅣ 아킬레우스가 무장을 갖추고 나서다
20권 신들의 전투 ㅣ 아킬레우스와 아이네이아스의 대결 ㅣ 대결의 의미 ㅣ 아킬레우스의 군중 전투 ㅣ 아킬레우스가 헥토르와 마주치나 놓치다 ㅣ 아킬레우스의 군중 전투 2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s). ‘우리 시대에 읽어야 할 고전 100권’ 같은 목록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서양 최초의 문학작품(기원전 8세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리아스』가 누려온 존경과 찬탄은 그저 ‘최초’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내용 또한 풍부하고 짜임이 탄탄하다. 플라톤은 그 구절들을 외워서 자주 인용하고, 서정시인 삽포는 그 어휘들을 소화하여 자기 시를 꾸렸으며, 희랍 비극작가들은 여기서 파생된 이야기들을 작품 주제로 삼았다. 지금도 서구의 지식인들은 자주 『일리아스』에 나오는 일화들을 인용하고 암시한다. 그러나 이 대단한, 꼭 읽어야 할 고전엔 치명적 문제가 있다. 바로 읽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희랍어 원전을 저본으로 한 『일리아스』의 한국어판(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07)이 나와 있지만, 아직 많은 독자들이 선뜻 즐겨 읽지는 못하고 있다. 총 1만 5천 행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에다 시 형식의 딱딱한 생김새까지 사람을 겁먹게 하는 데다, 복잡하고 중층적인 구조와 희랍 서사시 특유의 낯선 관용어들까지 가세하니 처음 접하는 이가 읽을 엄두를 내기란 힘든 일이다. 이것이 『일리아스』 연구로 박사논문을 쓴 희랍고전 연구자 강대진이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그린비 리라이팅 클래식 011, 이하 『리라이팅 일리아스』)를 쓴 이유다. 그는 독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십분 이해한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제멋대로 짜깁기된 편역본만 읽어서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원전을 읽으려면 먼저 희랍 서사시를 읽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그간 정암학당과 철학아카데미 등에서 꾸준히 희랍운문 강독을 강의해 온 강대진은 이미 『고전은 서사시다』(안티쿠스, 2007)를 펴내 각 희랍 서사시의 특징별로 고전 읽기의 해법을 제시한 바 있다. 국내 최초로 출간된 『일리아스』 해설서인 『리라이팅 일리아스』는 기본적으로, 직접 작품을 읽으려는 사람들에게 읽는 법을 알려주기 위해 쓰였다. 지은이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작품 전체의 구조와 희랍 서사시 특유의 기법들이다. 그래서 내용 소개에 치중하기보다는 다양한 요소를 첨가해 일종의 주석서가 되도록 글을 짰다. 『일리아스』를 읽으며 독자들이 어려움을 느끼는 대목 하나하나마다 해결책을 제시하듯 고전 중의 고전, 원전 중의 원전인 이 작품이 가진 풍부한 향기를 충분히 맛볼 수 있도록 꼼꼼히 서술하였다.
『일리아스』가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형식과 주제
▶ 희랍 서사시의 운율과 공식구 일리아스는 서사시(敍事詩), 즉 이야기 시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장단의 운율(장단단 육보격dactylic hexameter)에 맞추어 쓰인 시인지라, 구성 방식이 독특하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낯선 표현들도 자주 등장하고, 무엇보다도 행이 나뉘어 있으니 술술 읽히지도 않는다. 게다가 희랍 서사시에서는 같은 사물이나 인물이 항상 같은 구절로 표현되곤 해 독자들이 적응하기가 힘들다. 아폴론이 아폴론보다는 ‘제우스와 레토의 아들’로 불린다거나 아킬레우스는 항상, 심지어 앉아 있을 때조차 ‘발이 빠른 아킬레우스’라고 불린다. 이런 구절들을 ‘공식구’(fomula)라고 부르는데,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왜 같은 구절이 거듭 나오는지 꽤 짜증스러울 수도 있다. 이는 20세기 이후로 나온 구송시(oral poetry) 이론에 따르면, 시인이 운율이 맞는 구절을 외고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운율을 맞추기 위해 거듭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되는 부분인데, 이런 표현들에 빨리 익숙해지면 희랍 고전을 읽는 즐거움이 한층 배가될 것이다.
▶ 주제가 트로이아 전쟁이라는 편견을 버려라 원전 읽기의 어려움을 감수하기로 결심한 독자들에게 당혹감을 안겨 주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일리아스』가 트로이아 전쟁의 발발 원인인 ‘파리스의 판정’으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엉뚱하게도 이 작품의 첫 대목은 어떤 여신(운명의 여신, 즉 무사Musa 여신이다)에게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대해 노래해 달라고 청하면서 시작된다. 사실은 이것이 『일리아스』의 핵심 주제다. 이 서사시는 아가멤논에게 전사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당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트로이아 전쟁의 전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결국 어떻게 해소되는지 노래하는 시이다. 하지만 이 서사시가 트로이아 전쟁을 다루고 있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니다. 희랍 서사시는 어떤 사태의 중간에서 시작하되(라틴어로는 ‘in medias res’, ‘사건 한가운데로’라는 뜻으로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시학』에서 처음 쓴 말이다), 그 안에 사건의 시작과 끝을 모두 담고 있기 떄문이다. 『일리아스?는 트로아이 전쟁이 일어난 지 10년째 되던 해의 며칠만을 다루지만, 그 안에서 전쟁의 발단과 결말을 모두 알 수 있다. 트로이아 전쟁이 어떠한지 보여 주는 부분은 2권의 ‘배들의 목록’과 3권의 ‘파리스와 메넬라오스의 대결’ 부분이고, 전쟁이 어떻게 끝날지는 주로 앞날에 대한, 트로이아 인물들의 언급에서 드러난다. 트로이아 전쟁이라는 일반 주제는 배경이고, 그 전면에 인물들의 전투 장면과 그에 따라 전개되는 사건들, 그리고 인물 내면의 갈등이라는 특수 주제가 부각되면서 전체 서사가 이루어진다.
* 『일리아스』의 전체 줄거리 희랍군의 총대장 아가멤논은 희랍군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에게 공개적으로 모욕을 가한다. 이에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전투 참가를 거부하는 한편, 여신인 어머니 테티스에게 부탁해서 자기가 빠진 희랍군이 전투에서 패배하게 해달라(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높여 달라)고 최고신 제우스에게 청한다. 희랍군은 아킬레우스 없이도 한동안 잘 싸우지만 트로이아의 수호전사 헥토르의 결사항전으로 인해 결국 엄청난 위기에 처하고, 그것을 보다 못한 아킬레우스의 절친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무장을 입고 전투에 참가한다. 하지만 큰 공을 세우고 적을 격퇴하는 것도 잠깐, 그는 결국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한다. 희랍군을 향하던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이제 친우를 죽인 헥토르를 향해 불타오른다. 그는 헤파이스토스가 만든 새 무장을 걸치고 나가 트로이아군을 셀 수 없이 도륙하고 마침내 원수 헥토르마저 죽인다. 복수 후, 친구의 장례를 치르고도 화가 풀리지 않은 아킬레우스는 날마다 헥토르의 시신을 학대하지만, 결국 신들의 중재로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보낸다. 작품은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다루지 않고, 헥토르의 장례가 치러지면서 끝이 난다.
균형과 반복, 『일리아스』의 서사 구조
▶ 전투가 일어나는 날짜별로 읽자: 내적 균형의 구축 『일리아스』를 읽는 독자들에게 어려움을 주는 또 다른 요인은 전투 장면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작품 첫머리와 결말 부분을 제외한 중간 어디를 펼쳐도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잘 파악이 안 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숨겨진 질서가 있는데, 그것은 작품 전반에서 희랍군과 트로이아군에게 (희랍군이 약간 우세한 가운데) 일종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질서는 전투 장면을 날짜별로 나누어 볼 때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투 묘사가 차지하는 분량은 많지만 날짜로 따지면 모두 나흘뿐이다. 『리라이팅 일리아스?는 『일리아스』를 ‘전투 이전’과 전투 첫째 날로부터 넷째 날까지의 4일 그리고 ‘전투 이후’의 6부로 나누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전투 첫날은 전황이 매우 균형 잡힌 날이고, 전체 서술도 그런 균형을 보인다. 우선 맨 앞에 파리스와 메넬라오스의 단독 대결이 자리 잡고 있다. 중간은 디오메데스가 대활약을 보이는 부분(‘수훈기’aristeia)으로 되어 있고, 마지막에는 헥토르와 아이아스의 단독 대결이 놓여 있다(대결―수훈기―대결의 균형 구도). 지나간 9년 동안의 전투를 요약해서 보여 주는 복습 파트와도 같다. 나머지 사흘은 하루씩 양쪽이 번갈아 승리하는 날들로 되어 있다. 겨우 한 권(8권)으로 되어 있는 짧은 둘째 날은 희랍군이 크게 패배하는 날이다. 셋째 날(11~17권)은 전체적으로 희랍군이 패색을 띄는 가운데 서로 세 번씩 우세 국면을 맛보는 날이고, 마지막 날(19~22권)은 아킬레우스의 출전으로 희랍군이 대승을 거두는 날이다(트로이아 우세―각축―희랍군 승리).
▶ 되돌이 구성에 주목하라: 반복되며 성장하는 주제들 『일리아스』는 전체 구조로 보나, 부분적으로 보나 ‘되돌이 구성’을 많이 사용한다. 이 구성법은 서로 짝이 되는 요소가 서로 대칭되는 위치에 나타나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예는 A―B―A의 꼴인데, 우선 어떤 주제를 언급하고 다른 주제로 갔다가, 다시 처음 주제로 돌아가서 말을 맺는 형식이다. 위의 도식에서 A가 내부적으로 a―b―a의 꼴을 보일 수도 있다. 되돌이 구성은 보통 독자나 청중에게 어떤 완결감을 주기 때문에, 이 구성법이 쓰인 부분들은 ‘자기 완결적’ 단위로 해당 부분의 소주제를 강조한다. 하지만 길게 이어진 작품이 이렇게 토막토막 나뉘기만 하면 곤란하므로 전체를 하나로 이어 주는 요소들이 필요하다. 『일리아스』가 사용하는 연결 장치 중 중요한 것이 ‘반복되면서 점차 성장하는 주제들’이다. 호메로스 서사시의 구성 원리는 바로 반복이다. 구절들, 주제들, 장면들 모두가 거듭거듭 되풀이된다. 하지만 그냥 늘 같은 게 나오는 건 아니다. 매번 조금씩 변형된다. 이런 방식은 독자와 청중이 내용을 쉽게 받아들이게 해주면서도, 약간의 변경으로써 이야기 발전을 경제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시인은 비슷한 주제와 장면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그것들을 점차 강하고 크게 만들어 나간다. 그 발전 계열의 끝에는 보통 아킬레우스가 있다. 그 전까지 조금씩 조금씩 자라 오던 소주제들(무장 장면, 수훈기, 복수, 시신쟁탈전 등)이 아킬레우스가 다시 전투에 등장하는 대목에서 가장 뚜렷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희랍 시대의 청중처럼, 세부 묘사에 집중하기
구조에 좀 익숙해졌다면, 이제 세부적인 요소들에 관심을 기울여 보자. 『리라이팅 일리아스』는 이 작품이 공연되던 고대 희랍 청중의 관점에서 『일리아스』를 설명한다. 작품 전체의 거의 3/4을 차지하는 전투 장면들은, 줄거리를 요약할 때는 보통 생략되기 때문에 원전을 직접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생소할 것이다. 하지만 옛 청중들은 이 부분을 매우 즐거이 들었을 터이고, 시인 역시 굉장한 노력을 들여 그 세부를 묘사했다.
▶ 탁월한 이미지 묘사에 주목하라 지은이 강대진은 『일리아스』가 가진 영화적 특성을 한 장면 한 장면 짚어 주면서 이 작품을 현대적으로 읽도록 해준다(물론 1차적으로는 놀라운 것은 3000년 전에 이런 기법을 활용하는 호메로스의 재능이다). 앞으로 중요하게 쓰일 무기나 특별한 의미를 지닐 사물을 공들여 묘사하는 작업은 영화의 중요 장면에서 컷을 많이 사용하거나, 특별히 길게 보여 준다거나 하는 경우와 유사하다. 어찌 보면 호메로스의 서사시들은 ‘하이퍼텍스트 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때로 이야기 진행을 방해하는 자세한 묘사들은, 우리가 요즘 컴퓨터 화면에서 어떤 낱말을 클릭하면 나오게 되는 말풍선이 그냥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또 전쟁 장면에서 병사들이 행군하는 장면을 다양한 직유를 통해 형상화하는 것은 몽타주 기법과 유사하다 할 수 있다. 지은이는 희랍군의 목록이 제시될 때 성벽에서 멀리 내려다보는 장면을 하늘에서 내려 찍은 ‘설정 쇼트’, 아가멤논이 각 부대를 순시하는 장면을 ‘들고찍기’ 기법 등에 빗대 읽는이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또한 『일리아스』의 시인이 단번에 전체를 묘사하지 않고,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정보를 내놓는 것은 한 편의 추리영화를 보는 듯하다. 오늘날의 관객은 반전 있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고대의 관중은 앞으로 이야기 진행이 어찌 될지 슬쩍 알려주는 ‘스포일러’를 좋아했다. 이것은 문자가 없던 시대에 청중이 이야기를 따라가기 쉽게 해주는 장치이며, 다른 한편 옛 사람들이 예고된 사건이 일어날지 아닐지를 조마조마해 하며 기다리면서, 지금의 우리와는 다른 방식의 즐거움을 찾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 단조로운 서사를 풍부히 하는 작은 이미지들: 직유와 인물 소개 『일리아스』는 전쟁터에서 며칠간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일상에 대한 묘사가 매우 적은데, 그 부족함을 메워 주는 것이 바로 직유다. 거기에는 사건들의 직접적인 배경에는 나오지 않던 자연과 일상이 그려진다. 귀하게 자란 멋진 젊은이들이 ‘비 맞은 양귀비처럼’ 목이 꺾이거나 ‘미친 바람에 뽑힌 올리브나무’처럼 쓰러진다. 매우 생생한 묘사다. 이는 영웅들의 수훈 위주로 전투 장면만 반복되는 흑백 영화에 컬러 영상이 삽입되면서, 한층 진한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장치다. 한편 인물 소개는 전장에서 쓰러지는 수많은 인물들, 자칫 평면적일 수도 있는 이들에게 특징과 개성을 부여하고, 그 죽음에 어떤 울림(파토스)를 씌워 준다. 이를 테면 누구는 좋은 집에 예쁜 아내를 데려다 놓았지만 즐거움도 누려보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먼지를 물고 쓰러졌다든지, 누구는 재산이 많지만 그의 아버지는 상속자를 잃고 쓸쓸히 늙어 가게 되었다든지 하는 식이다. 사실 많은 전사들이 죽는 순간에 단 한 번 등장하기 때문에, 사실상 ‘죽기 위해서’ 등장하는 셈이다. 수많은 전쟁영화에서 이런 엑스트라들은 거의 소품 취급을 당한다. 이들은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용되는 일종의 배경이다. 하지만 『일리아스』의 시인은 죽음의 순간에 인물 각자의 생애를 소개함으로써, 희생자를 제 나름의 삶을 살아 온, 특징 있는 개인으로 만든다. 영화에 빗대어 말하자면, 한 전사가 쓰러지는 순간 갑자기 시간의 흐름은 정지하고 화면은 과거로 돌아가 그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부분을 보여 주는 식이다. 이로써 희생자는 독자의 기억 속에 조금이나마 특별한 존재로 자리 잡게 된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운명
▶ 시인은 과거의 행복과 현재의 고통을 대비시킨다 앞에서 되돌이 구성에 대해 말했지만, 『일리아스』의 시인은 이야기의 끝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경향을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권에 나오는 ‘트로이아의 역사’다(20:215 이하). 이제 아킬레우스가 다시 전장에 복귀했으니 헥토르는 곧 죽을 것이고, 가장 큰 수호자를 잃은 트로이아 역시 곧 멸망하게 될 것이다. 그 분기점에서 시인은 갑자기 트로이아가 처음 세워지던 때로 돌아간다. 이런 대조의 기술은, 지나간 평화와 행복을 현재와 미래의 고통과 상실에 대비시키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헥토르의 죽음을 알게 된 부인 안드로마케가 혼절할 때 그녀의 머리에서 땅으로 떨어진 면사포는 젊은 날의 행복, 신부의 설렘, 순수한 사랑의 기쁨과 전쟁의 파괴와 죽음의 상실을 대비시킨다. 또 헥토르가 아킬레우스를 피해 달아나다가 트로이아 성 앞의 아름다운 샘을 지나갈 때, 시인은 이 샘터가 옛날 평화롭던 시절 트로이아 여인들이 빨래하던 곳이라고 알려준다. 이제 그 평화롭던 시절은 끝났으며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할 뿐이다. 어떠한 승리도, 복수도, 명성도 그 평화를 돌려주지 못한다. 이 고통이 짙을수록 일상과 인간다운 삶에 대한 소중함은 더욱 커진다.
▶ 죽음의 운명을 받아들이라: 아킬레우스의 성장 『일리아스』는 무엇보다도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운명이 어떤 것인지 돌아보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한다. 바로 이것이 이 작품이 주는 큰 감동이다. 하이데거가 희랍 고전으로부터 다시 환기시켰듯이, 우리 인간은 모두 언젠가 ‘죽을 자’들이다. 옛 사람들은 여기서 인간의 한계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색했다. 또 하나 사회적 지위의 문제가 있다.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은 어딘가 사회에 속하기 마련인데, 거기서 주어진 지위와 객관적인(또는, 스스로 평가하는) 자질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아킬레우스는 세상 누구보다 뛰어난 자질을 갖고 있지만, 자기보다 훨씬 못한 아가멤논의 권력 아래 놓여 있다. 그는 그것을 못 견뎌 하고, 그 상황을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서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바꾼다. 하지만 그냥 체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처해진 그 자리에서 좋은 통치자란 어떠해야 하는지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 그는 아들 헥토르의 시신을 찾으러 온 프리아모스를 맞아 접대하고 위로하고 아들을 돌려준다. 이 마지막 것은 신들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이제 그는 동료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동정하며, 이 세계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관용을 베푸는 자가 되었다. 『일리아스』는 인간의 운명과 더불어 인간의 위대함을, 그 성장 가능성을 보여 준다. 아킬레우스로 대표되는 인간은, 죽음의 운명을 의식하고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삶을 이어 간다. 우리가 아킬레우스를 마지막 보았을 때, 그는 여인 곁에서 자고 있었다. 죽음은 언제든 닥칠 것이고, 헥토르의 장례식 다음에 ‘필요하다면’ 그는 또 싸웠을 것이다. 비관할 것도 없고 무기력할 것도 없다. 식음을 전폐하고 과거의 분노를 되살릴 것 없이 당장 해야 하는 일을 한다. 그는 명예를 얻었다. 자신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 동료들이 여전히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많은 적을 쓰러뜨려서가 아니라, 자기 운명을 받아들이고 적에게 관용한 데서 생겨난 새로운 명예이다. 『일리아스』는 인간 역사의 새벽에, 아직 소년 또는 청년인 인간들이 이 세계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자각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견뎌내려 애쓴, 그 시도의 결과라 할 것이다. 지은이는 독자들이 『리라이팅 일리아스』를 통해 『일리아스』에 좀더 쉽게 도달하기를, 그러면서 희랍 서사시의 구조를 확인하기 위해 전체를 자꾸 돌아보기를, 그리고 그러는 중에 다른 작품들도 그렇게 살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를 희망한다. 또 여기서 시작해서 희랍 비극들로, 다른 서사시들로, 문학 일반으로, 모든 종류의 ‘이야기’들로 관심을 넓혀 갈 수 있기를 바란다. 전체의 구조를 찾아내는 능력은 문학 작품뿐 아니라 같은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나 연극에 대해서도 적용 가능할 것이고, 모든 종류의 이야기들에 대한 관심은 독자들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할 것이다.
책속에서
호메로스 서사시의 구성 원리는 바로 반복이다. 구절들, 주제들, 장면들 모두가 거듭거듭 되풀이된다. 하지만 그냥 늘 같은 게 나오는 건 아니다. 매번 조금씩 변형된다. 비슷한 것이 다시 등장하면서 전과 조금 달라졌으면 사람들은 그 차이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따라서 이런 방식은 독자와 청중이 내용을 쉽게 받아들이게 해주면서도, 약간의 변경으로써 이야기 발전을 경제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시인은 비슷한 주제와 장면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서 그것들을 점차 강하고 크게 만들어 나간다. 그 발전 계열의 끝에는 보통 아킬레우스가 있다. 그 전까지 조금씩 조금씩 자라 오던 장면들이 아킬레우스가 등장하는 대목에서 가장 뚜렷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그렇게 반복되는 장면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어떤 장면이 앞이나 뒤에 나온 다른 장면과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지적할 때면, 이 장면들이 전체를 연결해 주는 장치이고 점차로 성장해 가는 계열을 이룬다는 걸 생각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