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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저자사항
시대의 불침번 : 정경모 자서전 / 정경모 지음 인기도
발행사항
서울 : 한겨레출판, 2010
청구기호
951.092 -10-13
자료실
[서울관] 서고(열람신청 후 1층 대출대), [부산관] 서고(열람신청 후 2층 주제자료실)
형태사항
525 p. : 사진 ; 23 cm
표준번호/부호
ISBN: 9788984314269
제어번호
MONO1201037044
원문

목차보기더보기

표제지

추천글 / 임재경

추천글 / 황석영

머리글 / 정경모

목차

1부 나는 조꼬만 봉사씨외다 25

봉사씨가 검은 흙 속에 묻히는 뜻은 27

맥아더 사령부의 동량들 30

GHQ가 배출한 세 사람의 반미운동가 33

일본의 '광기'에 붓 들어 '항변' 36

때리는 일본, 감싸는 미국의 '은밀한' 속셈 39

트루먼의 외교 고문 덜레스의 '기만' 43

이승만 총애 받고 '친일 군경' 활개 47

내가 자란 영등포 '이백채 마을' 50

A급 전범을 예수에 빗댄 '군국의 후예들' 54

'신사참배' 거부한 당돌한 아이 58

짧은 '영예' 긴 '치욕', 경기중학 시대 61

황민화의 세례를 받은 경기 제38회 임오군단 65

해방 공간, 치열하게 살다 간 내 친구 혁기 68

2부 해방군이 몰고 온 전쟁의 비극 73

일본을 위해 몸 바쳐 싸우라고 외치던 춘원과 육당 75

폭풍 전야에 만난 평생 배필 78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의 말 82

집에서 맞이한 해방, '구세주'가 된 미국 86

서울 입성, 이미 그어진 38선 89

미국 선견대와 총독부의 술잔치 93

통한의 38선, 미국이 긋고 소련이 거들고 96

몽양 선생과 따님 연구 씨 100

산산이 흩어진 '통일독립국가'의 꿈 104

서울대 의과대학 시대의 추억 107

나는 무엇 때문에 미국으로 떠난 것인가 110

40년 뛰어넘은 '백범의 발자취' 114

가시밭길의 돌베개 118

궁핍한 유학 생활, 큰 힘 된 '이승만 장학금' 121

격랑 헤치고 첫사랑 지요코와 백년가약 125

운명의 갈림길, 3월 12일의 표결 128

야합이 낳은 반쪽 국가 132

'일본말이 모국어'이던 판문점의 국군 장성 136

조이 vs. 남일의 불꽃 튄 설전 139

'유엔군'이란 군대는 없다 143

한국전과 베트남전, 미국 분할 통치의 '쌍생아' 146

기피 인물로 낙인, 일본으로 추방 149

3부 서울의 이방인 153

짐 꾸려 서울로, '14년 생이별'의 시작 155

'은인 이승만'을 지우다 158

'조봉암 사법살인', 정권 붕괴의 서곡 161

4.19와 5.16의 기억 164

5.16쿠데타 '지지 외교' 나선 일본의 속내 167

2박 3일의 기막힌 가족 방문 여행 170

돈 떼이고 집 날리고 '고난의 서울살이' 173

궁핍 속에서 경험한 장준하 선생의 사상적 변혁 176

고향 땅과의 생이별 179

4부 망명시대 183

신문사 투고로 시작된 문필 활동 185

예언서 같았던 첫 저서 『어느 한국인의 감회』 188

김대중 씨와의 첫 만남 191

현대사 격랑 속 '한 배 탄 세 사람' 195

〈세카이〉편집인 야스에 씨와의 인연 198

한민통과의 악연의 시작 201

DJ 향한 '기대와 실망'의 엇갈림 204

내가 무정부주의자? 어쨌든 '영광'이외다 207

'재침략' 노리는 일본에 '굽실굽실' 박 정권 210

중국 일깨운 3.1운동, 미국 가르친 4.19 혁명 214

김대중 납치 사건의 그날 216

"김대중을 살려주시오"-키신저에 대한 애소 220

중앙정보부 공작선 용금호 속의 김대중 223

〈세카이〉9월호가 발휘한 힘 226

한국의 '제2해방'과 일본의 '제2민주화' 229

'DJ 비난' 극우 선봉장에 TV 토론 '완승' 232

반독재 영문 소식지 〈코리아 뉴스레터〉 235

〈아사히신문〉반입 금지, 박정희의 긴급조치 238

윤이상·문익환·정경모의 '반독재 삼각편대' 241

무지라는 범죄 245

호화주택 파문에 재정부장 잃은 한민통 248

꿩 먹고 알 먹는 정경모 축출의 시나리오 251

"당신은 펜타곤 스파이", 한민통의 '인민재판' 254

5부 씨알의 힘으로 259

사숙 '씨알의 힘'을 개설하다 261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264

동지 의식 일깨운 문 목사의 '옥중서한' 267

민주투사 되어 30여 년 만에 재회 271

커밍스와 매코맥이 알려준 '역사의 진실' 274

김홍무, '씨알의 힘' 버텨준 든든한 동지 277

미 공화당 전당대회와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280

주한 미군은 누구를 위해 있다는 것일까? 283

장준하 선생의 '의문의 실족사' 286

일본군 박정희 vs. 광복군 장준하, 숙명적인 대결 289

한국은 일본이라는 장(將)을 지키는 상(象)이다 293

'한국 폄훼' 일본 논객과 지면 통해 전면전 296

6부 미국과 일본의 본질을 묻는다 301

"미국을 믿지 마라" 브루스 커밍스의 조언 303

일본인들 '우상'에 미국 대통령도 열광 306

루스벨트 대통령과 태프트-가쓰라 밀약 309

미국이 키운 쌍생아, 박정희와 팔레비 312

박정희, 김재규, 그리고 글라이스틴 316

김대중은 한국의 호메이니? 319

왜 광주였나? 왜 김대중이고 '한민통'이었나? 322

'광주'의 충격과 한국인의 각성 325

"조선을 다시 일본 품에", 미국의 '케넌 설계도' 328

케넌 '설계'와 A급 전범 기시 노부스케 332

케넌 '설계도'와 6.25전쟁 335

메이지 시대에 대한 일본인의 향수와 집착 338

메이지 일본의 설계자 요시다 쇼인 341

7부 모든 통일은 선이다 345

6.29선언과 김현희 사건의 수수께끼 347

후보 단일화의 실패와 '갈 테야' 목사의 평양행 350

'6.29'는 왜 '속이구'였나? 353

군부정권 파고든 세지마의 돈뭉치 356

문 목사 손에 전해준 '평양발 전보' 359

배짱으로 밀어붙인 '문 목사 방북 준비' 362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365

"민생단 사건에 정 선생도 말려드셨지요?" 368

평양 떠나던 날 들려온 '눈물의 플루트 가락' 372

'갈 테야' 문 목사의 영창(詠唱) 375

시부야 언덕길에서 부른 '선구자'의 노래 378

평양 도착 성명문 '모든 통일은 선이다' 381

민주와 통일은 하나 385

문 목사와 김 주석의 포옹 387

상제보다 더 서러운 복재기 391

"민족주의 하려 공산주의자 됐다"는 김 주석 394

통일 여정의 시작, 가슴으로 낳은 '4.2공동성명' 397

문 목사가 받은 사랑과 미움 401

8부 껍데기는 가라 405

'정경모 만나면 쇠고랑', 그냥 가버린 성 교수 407

"지명관 씨한테서는 왜 그렇게 미움을 사고 있나요?" 410

전옥숙-지명관 팀의 합동 작전 413

평양 측 공작원이고 또 펜타곤 스파이이기도 한 정경모 415

어느 재일 작가의 희비극 418

'복재기' 이회성과 '상제' 지명관 421

일본 역사는 왜 자기 나라 황실의 시조를 감추려 하나 424

일 왕실 비밀 쥔 '또 하나의 백제' 427

일본 『고사기』(古事記)에 기록된 주몽검의 뜻 430

일본의 황국사관과 '통석지념' 433

일왕이 말한 '통석'엔 사죄의 뜻은 커녕…… 436

한일 역사 연구보다 문화 개방이 급했을까 439

"조작된 반일 감정은 해소되어야?" 442

"386세대는 내가 키웠는데……" 445

9부 나는 원래 민족주의자 아니오이까 449

베를린 장벽의 붕괴가 뜻하는 것 451

폴란드 사회주의의 붕괴 배경은 '민족주의' 454

천안문 광장의 '자유 여신상' 그뒤엔…… 457

전쟁 재발이 코앞에, 1994년 6월의 위기 461

북미 핵 갈등, '끝나지 않은 전쟁' 464

"웃통, 바지, 그리고 속옷까지? 그건 안 된다"-김일성 467

미국이 먼저 파기한 '북미 제네바 합의' 470

'지이행난'(知易行難)인가 '지난행이'(知亂行易)인가 475

'대포동'(광명성 1호) 발사와 페리 '정책 조정관'의 등장 482

평화를 위한 클린턴과 김대중의 경쟁 485

2000년 한반도, 부등켜안은 남과 북 488

대통령으로 등장한 참새 두뇌의 부시 491

10부 아무 유한도 없소이다 495

문익환 목사의 불의의 참변 497

'28년 만의 귀국' 막는 협박에 쓰러진 윤이상 500

김 주석 소상 때의 평양 방문기 503

38선 넘는 박 여사 손에 들린 북쪽 탄원서 507

"슬퍼할 때와 춤을 출 때" 510

6.25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513

서양 나라 행세를 해온 일본의 '정체성 혼란' 517

일본 땅 흙이 될 것을 결심했을 때 520

험난했던 '시대의 불침번'…… 유한은 없소이다 523

판권기 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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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판사 책소개 (알라딘 제공)

    『찢겨진 산하』의 저자, 마지막 재일 망명객 정경모의 자서전

    “유한은 없소이다.”
    지난 1970년 일본 망명 이후 40년 동안 한국땅을 밟지 못하고 있는 여든일곱의 노 망명객 정경모 선생이 2년에 걸쳐 직접 원고지 2000매에 꼭꼭 눌러쓴 자서전 『시대의 불침번』의 마지막 문장이다.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과 미국 유학, 맥아더 사령부(GHQ) 직원으로서 판문점 휴전 회담 참여, 일본 망명, 문필 활동을 통한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 지원, 1989년 역사적인 문익환 목사와의 방북 등 우리 현대사의 중요한 현장에 직접 ‘서 있었고’, 민주화 이후 ‘자수서’ 작성 거부로 한국 방문이 무산되어 일본 땅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겠다고 결심한 ‘살아 있는 한국 현대사, 정경모 선생’의 삶이 자서전 『시대의 불침번』을 통해 세상에 선보인다.
    애초 자서전 집필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는 선생은, 2년 동안 온힘을 다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정리하면서,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못다한 이야기, 잊고 있던 삶의 연결고리, 그리고 어떠한 배경도 없이 붓 하나에 의지해 시대에 맞섰던 고독했던 삶의 응어리까지, 자신의 인생 전모를 이 책을 통해 털어놓는다.

    의학도에서 붓 하나로 세상과 맞서는 문필가가 되다

    선생은 본래 의학(게이오 의대, 서울대 의대)과 화학(에모리 대학)을 공부하던 자연과학도였다. 하지만 20세기 한국사가 지나온 격변의 시대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미국 유학 중 발발한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당시 유엔대사였던 장면 박사의 긴급호출이 그를 역사의 현장에 끌어들여 도쿄에 있던 맥아더 사령부(GHQ)의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판문점 휴전 회담에 통역관으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전쟁 후 미 사령부에 의해 ‘기피 인물’로 낙인찍히고, 이승만.박정희 독재 정권을 거부하며 일본으로의 망명을 선택한다.
    어떠한 조직이나 배경도 없고, 일본 사회에 비판적이며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던 그야말로 아웃사이더 재일 망명객이었던 그가 일본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은 신문사 독자 투고로 시작한 문필 활동 때문이었다. <아사히신문> 출판부에서 출간된 『어느 한국인의 감회』를 계기로 그는 일본의 대표적 진보 잡지〈세까이世界>의 필자로 활동하게 되었고, 김대중 납치 사건을 통해 급격히 관심이 커진 한국 정치 관련 전문가로 자리를 잡게 된다. 그뒤 나중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빌미가 된 단체 ‘한민통’의 기관지 <민족시보>의 주필로 열성적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조직 내 갈등으로 탈퇴하고, 1979년 비로소 선생의 문필 활동의 본거지가 될 사숙 ‘씨알의 힘’을 열어 잡지 <씨알의 힘>과 기관지 <씨알>을 펴내며 한국 민주화 운동을 외곽에서 지원한다.
    정경모 선생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책 『찢겨진 산하』(1986) 역시 1983년 <씨알의 힘> 6월호에 발표했던 원고를 번역한 것이었다. 여운형과 김구, 장준하 등 한국 현대사의 주역이었던 세 인물이 저승의 구름 위에서 만나 정담을 나누는 독특한 형식을 취한 이 책은, 남북 분단의 과정을 강대국 간의 이데올로기 다툼이 아니라 친일 행위와 농지 소유관계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세력과 그것을 지키려는 세력 간의 현실적 갈등에 주목함으로써 해방 공간 역사에 대한 시각을 전면적으로 바꾸어 놓은 문제작이었다.

    어떠한 역사책도 알려준 바 없는, 우리 현대사에 대한 생생한 증언

    이 책 『시대의 불침번』은 단순한 자서전이라 하기엔, 정경모 선생이 겪은 삶이 너무나 비범하고, 그가 체험한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의 밀도가 높다. 책 제목으로 쓰인 ‘시대의 불침번’은 그의 오랜 동지이자 막역지우인 소설가 황석영이 그에게 붙여준 별칭인데, 그가 살아온 삶을 되짚어보자니, 그 의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소이다” “~이외다” “~소이까?” 등의 종결어미로 끝나는 특이한 구어체로 서술되어, 마치 옛이야기를 듣는 듯 감칠맛 나는 가락 속에 담겨 있는 선생의 삶과 오직 그만이 알고 있는 우리 현대사의 장면들은 드라마틱하다. 1945년 9월 초 ‘해방군’ 미군을 맞으러 영등포 네거리로 플래카드를 써서 마중나간 이야기며, 미국 유학 중 이승만.프란체스카 여사와의 직접 서신 왕래를 통해 학비를 도움 받은 일, 훗날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던 문익환.박형규 목사와의 맥아더 사령부에서의 교유, 판문점 휴전 회담의 생생한 풍경, 4.19를 촉발한 3.15 부정 선거의 주동자 최인규 내무장관과의 인연, 울산석유화학단지 건설에 고문으로 참여했던 이야기, 일본에 망명해 있던 김대중과의 만남, 그리고 무엇보다 1989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한 역사적인 방북.김일성 주석과의 만남에 얽힌 뒷이야기 등은 놀랍도록 생생하다.

    한반도 현대사에 대한 전방위적 시선

    이러한 기록들이 한 개인이 겪은 특별한 체험담으로 끝나는 않는 것은, 선생의 개인사가 오랜 세월 다듬어온 역사적 안목과 관점 아래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일본 유학과 미국 유학을 통해 언어만을 익힌 것이 아니라, 시대를 움직이는 거대한 흐름, 즉 국제정치의 역학 관계에 대해 일찍이 눈을 떠왔다. 게다가 오랜 문필 활동을 통한 자료 수집, 『한국전쟁의 기원』(선생이 이 책의 일본어판 역자이다)의 저자 브루스 커밍스, 동아시아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 개번 맥코맥 호주국립대 명예 교수, 와다 하루끼, 전 이와나미서점의 야스에 료스케 사장 등과의 오랜 교류를 통해 ‘한반도의 근현대사에 대한 다자적 시점’을 가질 수 있었다.
    선생은 미국과 일본의 패권 세력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국익’이 무엇인지 간파하고 있었고, 그 역사적 뿌리가 미국의 필리핀 지배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상호 승인한 1905년의 ‘태프트-가쓰라 밀약’에 있으며, 불행하게도 ‘미국과 일본의 거대한 커넥션’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오직 지성과 양심에 기대어, 스스로 선택한 야간부의 삶”

    책 속에 소개되어 있지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관해 도쿄에서 열린 한 심포지움(2006)에서 백낙청 교수는 정경모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가 있다.

    “그는 평생을 한국의 민주화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헌신해오셨다. 그러고도 남한의 상당수 민주화 운동가들이 영달의 길에 오르고, 해외 통일운동가들 대다수 남북을 드나들며 예우를 즐기게 된 오늘까지 여전히 일본 땅에서 외롭게 당신의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고 계신다. 나는 이런 상황이 되도록 빨리 바뀌기를 충심으로 기원하지만 그의 완강한 고독이 불의와 굴종으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의 불명예를 씻어내는 데 크게 일조했다고 믿는다.”(523~524쪽)

    마음만 달리 먹었다면 대한민국 땅에서 누구보다도 더 영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정경모 선생은 오직 “자신의 지성과 양심”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을 걷는 ‘야간부’의 삶을 선택했다. 그 대신 역사의 뒤안길에 서서 ‘은폐된 역사’를 밝혀내고,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구인지”를 사람들을 향해 외치는 특별한 1인 사관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의 회유에 타협하지 않고 ‘완강한 고독’을 견뎌냄으로써, ‘우리 현대사가 잊을 수 없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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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30-33] 내가 1950년 6월에 한국전쟁을 맞이한 것은 미국 유학생으로 에모리 대학 대학원에서 연구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소이다. 식민지 시대에 경기중학을 나오고 일본으로 가서 게이오 대학 의학부에 있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잠시 서울대 의학부에 적을 두고 있었으나 1947년 8월 미국 유학길로 떠난 것인데, 에모리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화학 공부에 열중하고 있던 바로 그때 6·25전쟁이 터진 것이지요. 당시 주미대사가 4·19학생혁명 뒤 제2공화국 국무총리가 되는 장면 박사인데, 그분으로부터 워싱턴에서 긴급 전화가 걸려왔어요. “지금 우리 신생 대한민국이 공산군의 침략으로 존망지추(存亡之秋)에 있는데 그렇게 한가하게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내서야 되겠는가. 이것은 프란체스카 부인의 특명이니만치 가타부타 잔소리 말고 곧 도쿄로 떠나 맥아더 사령부로 들어가라!”
    그때 유학생으로 미국에 건너간 이후 학비로 곤란을 겪을 때 참으로 기적적인 연유로 이승만 대통령의 알선을 통해 미국의 육영자금을 받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까 프란체스카 부인과는 대사관 행낭(파우치)을 통해 수시로 서신을 교환하고 있던 처지였어요. ……
    문 목사 얘기를 해놓고 새삼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것은 맥아더 사령부에 있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훗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게 되는 사람이 셋이었는데, 바로 문익환, 박형규, 그리고 나 정경모였고 셋이 모두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이에요. 두 분은 목사님이시니까 물을 필요도 없으나, 나 자신도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고 한때 목사가 될 생각도 있었으니 지금은 비록 주일날이라고 해서 성경.찬송 옆에 끼고 예배당에 가는 식의 기독교인은 아니나마 정서의 바탕은 지금도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P. 81-85] 그런데 이상스러워요. 팔십 평생을 살아온 지금 일생을 되돌아보면 열아홉 살 나이에 하숙집을 찾느라고 히요시 마을, 그 집 현관문을 연 그 순간, 내 인생역정의 전부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오이다. 예정론 그대로예요. 다음 날 또 갔어요. 아주머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딸하고 의논하니 괜찮다고 하니까 어느 날이고 이사를 오라 그러시더군요.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내일 이삿짐을 가지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집을 나왔소이다. 그 집 따님을 만나볼 생각도 하지 않고 말이외다. 그때 얼굴도 안 보고 문밖으로 나온 그 집 따님 지요코(千代子)가 오늘까지 백년해로로 인생길을 같이 걸어온 현재의 아내이며, 나를 극진히 귀여워해주시던 아주머님이 장모님이셨던 것이외다.
    그때 지요코가 살며시 내 어깨에다 머리를 얹더니 잠시 후부터 훌쩍거리기 시작합디다.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쓰라린 마음을 위로해줄 수가 있었겠소이까. 처음으로 지요코를 가슴에 안고 귀에다 대고 약속을 했소이다. 꼭 다시 돌아올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요.
    다음 날 집을 나서는데 도쿄 역까지 배웅하러 나가겠다던 지요코는 눈이 퉁퉁 부어 도저히 외출할 형편이 아니었소이다. 대문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도쿄 역으로 향한 것인데― 참으로 희한한 일이죠. 정말로 그날부터 5년 4개월 만인 1950년 11월 초 약속한 대로 돌아서 돌아서 태평양을 건너 히요시의 옛날 그 집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이오이다. 기적이란 이런 일을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겠소이까.
    [P. 187-188] 약속한 날 아사히신문사 식당에서 그분을 만났는데 투고란은 원래 정년이 가까운 노련한 기자가 담당하는 것이 상례이듯, 당시 40대이던 나보다 훨씬 연배가 위이고 퍽 세련된 용모의 인물이었소이다.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미 6년 전인 한일협정 당시 한국 학생들의 반대운동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또 협정 이후 일본으로부터 흘러 들어가는 정치자금이 한국 권력층에 어떠한 형태의 부패를 불러일으키고 있는지, 신문기자인 그분에게조차 놀라운 뉴스였던 것이외다. 비단 그분만이 아니라 일본 언론 전반에서 한국 문제는 흥밋거리가 아닌 시대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노릇이었지만 말이외다.
    얘기 끝에 그분이 묻습디다. 투고문 이외에 써둔 원고는 없는가, 있으면 보여달라고 말이외다. 그래서 며칠 후 400자 원고지 100장가량의 원고를 가지고 다시 만났는데, 도노 씨가 원고를 훑어보고 그 자리에서 말을 건네주더이다. “이거면 됐다. 계속 써달라”고 말이외다.
    이렇게 해서 내 책 『어느 한국인의 감회』(ある韓?人のこころ, 朝日新聞社, 1972)가 세상에 나오게 되는 것인데, 그때가 바로 7.4남북공동성명 발표 직후인 1972년 9월이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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