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 1. 속세를 떠나 한적한 곳에 살다65 2. 우연히 씀66 3. 병인년(丙寅年, 1266) 여름 초에 감로사(甘露社)에 들어가서 동포(同袍)에게 보임66 4. 산에서 놀다 돌아오는 길에 삼랑루(三郞樓)를 지나면서 배 가운데서 짓다67 5. 안렴사(按廉使) 박항(朴恒)이 밀성(密成: 밀양) 삼랑루(三郞樓)라 제(題)한 시의 운을 따라68 6. 한가로운 가운데 스스로 기뻐하면서69 7. 지원 9년 임신 3월 초에 정혜사(定慧寺)에 들어가 게(偈)를 지어 동범(同梵)에게 보임 69 8. 자인화상(慈忍和尙)에게 올리는 시. 서문을 곁들임70 9. 여러 스님들[大衆]과 같이 고사리를 뜯고 돌아와 동범(同梵)에게 보임71 10. 한가로운 가운데서 우연히 씀72 11. 여름날 규봉(圭峯) 인선백(印禪伯)을 생각하면서73 12. 안렴사(按廉使) 박시랑(朴侍郞) 항(恒)에게 부침74 13. 가을날 일찍 조계산(曹溪山)을 출발해 계족산(溪足山)으로 돌아와서 지음75 14. 어저께 도자(道者) 혜초(惠超)가 돌아오는 편에 삼가 내려 주신 납의(衲衣) 한 벌을 받고 두려움과 감격을 참을 수 없어 삼가 거친 글귀를 지어 주실(籌室)에 바치오니 보시옵기를 바랍니다76 15. 한가한 가운데 시간을 보내면서77 16. 감로장로(甘露長老)의 운을 따라 삼가 답함78 17. 산에 살면서 저물어 가는 봄을 읊음79 18. 봄을 아낌80 19. 법형(法兄) 묵공(公)이 나의 집안이 형제가 없고 고담(枯淡)하다는 것을 듣고 편지를 써서 위로하므로 농(弄)으로 단가(短歌)를 지어 답함81 20. 규봉(圭峯) 인선백(印禪伯)의 운을 빌려 답함83 21. 난송선사(蘭松禪師) 인공(印公)의 운을 빌려 답함84 22. 안렴(按廉) 김시어(金侍御)에게 보내는 시. 서문을 곁들임 85 23.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해서 김제형(金提刑)에게 부침86 24. 죄를 용서해 준 김시랑(金侍郞) 훤()에게 희롱으로 답함. 2수87 25. 운흥법주(雲興法主) 대이(大怡)를 곡(哭)함88 26. 스스로 희롱함91 27. 평양(平陽: 현 순천)에 부임하는 아우 수령 문개(文愷)가 주(州)를 다스리기 위해 이르렀다가 먼저 이 산중에 찾아왔다. 이날 저녁 마침 비가 내려 서로 10여 년간의 이별의 뜻을 나누느라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그리하여 소설당(蘇雪堂)이 자유(子由)에게 준 시 가운데 인용한 위소주(韋蘇州)의 “어느 때 비바람 치는 밤에 다시 잠자리를 같이할까”라는 구를 기억하고 1절을 지어 그(문개)에게 주었다.91 28. 막내 동생 추원당후 선(璇)이 앞의 시에 관한 소문을 듣고 차운해 보냈으므로 다시 그 운을 따서 답함92 29. 전 동각사인(東閣舍人) 우공(于公)이 앞의 운을 따라 시를 지어 보내 주었으므로 그 운을 사용해 답함93 30. 한가로운 가운데서 우연히 씀. 2수95 31. 규봉(圭峯) 인공(印公)이 월헌(月軒) 강박사(康博士)에게 준 시의 운을 따라. 4수96 32. 나는 출가하면서부터 서울은 가지 않겠다고 맹서했다. 그러나 금년 을해년(乙亥年, 1275) 3월에 조서를 받으니 서울에 오라는 것이었다. 일이 뜻하지 않은 데서 출발한 것이라 처음부터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관가(官家)의 독촉이 심해 사양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말을 타고 길을 떠나 웅천(熊川: 공주)에 이르러 항서(抗書)를 보내 병으로 굳이 사양하고 서원(西原)에 이르렀다. 서원목백(西原牧伯) 상서(尙書) 농서공(?西公)은 나의 평생 벗이었다. 보고 기뻐하면서 주리(州吏)에게 급히 명령해 주의 화정사(華井寺)를 깨끗이 청소하고 머물도록 권했다. 그 뜻이 간절하므로 어길 수 없어서 행장을 풀고 하안거(夏安居)를 시작했다. 아! 처음 계봉을 떠날 때는 서원 화정사에서 여름을 지낼 줄을 생각도 못했으나 이제 그렇게 되었으니, 범인(凡人)의 한 번 행하고 한 번 그치는 것이 자재(自裁)는 불가능하고 반드시 그렇게 시키는 무엇이 있는 것인가? 맹자가 “떠나고 머무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이제 더욱 믿을 만한 것이다. 그러므로 1절(一絶)을 지어 천의(天意)에 답하려는 것이다.97 33. 원흥사(元興寺) 임정(林亭)에서 놀면서99 34. 왕암사(王巖寺)에서 자면서 그 경지의 청유(淸幽)함을 사랑해 졸시(拙詩)를 씀100 35. 서원목백(西原牧伯)인 상서(尙書) 이공(李公)이 포천(布川)에 있는 자씨원(慈氏院)까지 전송했는데 이별할 때 슬픔을 견디지 못해 억지로 어설픈 말로 시를 지어 좌우에 바치다. 2수101 36. 서원(西原) 이상서(李尙書) 오(敖)에게 보냄102 37. 지원(至元) 13년(1276) 12월 요청을 받고 다시 서원에 도착해 현암난야(玄巖蘭若)에 우거하면서, 목백상서 이공에게 드림102 38. 밤에 많은 눈이 내렸으나 아무도 몰랐다. 새벽에 일어나 성 가운데를 바라보면서 짓다103 39. 전 서원(西原) 반자(半刺) 이직강(李直講) 행잉(行?)에게 보냄103 40. 노교서(盧校書)의 운을 따라 답함104 41. 천안부(天安府)의 군수 한낭중(韓郎中) 규(珪)에게 보냄104 42. 낙화를 애석히 여겨 읊음105 43. 정축년(1277) 3월 13일 진각사(眞覺寺)에서 놀면서106 44. 현암사(玄巖寺)의 자리를 파(罷)하고 되돌아오려고 한 수 남김107 45. 서원(西原) 지방의 도속(道俗)들이 성을 나와 울면서 전송하므로 느낌이 있어 시를 짓다 108 46. 서원(西原)을 떠나 회덕(懷德)에 이르렀다가 서원성 밖의 이별을 기억하고 시를 지어 목백 영각(鈴閣)으로 보냄109 47. 회덕(懷德) 여관에서 비를 만나109 48. (1277) 3월 24일 천호산(天護山) 개태사(開泰寺)에서 자면서. 충남 연산군110 49. 우연히 진(晉)나라 사람 곽문(郭文)의 전기를 읽다가 그가 이 속세를 떠나 산수 사이에 정을 붙임을 사랑했으므로 내 견해를 서술해 28운을 짓다110 50. 한가로운 가운데 우연히 씀114 51. 무인년(戊寅年, 1278) 11월 6일 대중을 거느리고 산으로 갔다가 다음 날 장경(藏經)을 지고 되돌아와 게를 짓다115 52. 조계산(曹溪山)의 누교(樓橋)를 지나다 원주(院主) 신공(信公)이 누각(樓閣)을 수리하는 것을 보고 감탄해 시를 지어 그를 칭찬함115 53. 정혜사 판상(板上)의 운을 따라. 순천군 북쪽 계족산에 있음116 54. 채방사(採訪使) 김시랑(金侍郞) 훤()의 운을 따라 답함118 55. 벽자운(碧字韻)에 답한 시를 삼장장실(三藏丈室)에 부침118 56. 절구(絶句)123 57. 다시 앞의 운을 따라 채방사 김시랑 훤에게 답함124 58. 우중(雨中)에 혼자 앉아124 59. 한가로운 가운데서 우연히 씀. 2수 125 60. 김녕(金寧) 최태수(崔太守) 알(謁)이 사임하려고 서울에 갔더니 임금이 고을 사람들의 바람이라면서 주치(州治)로 되돌아가도록 칙령을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 시를 지어 그에게 부침126 61. 채방사(採訪使) 김시랑(金侍郞)의 운을 따라 답함127 62. 규봉(圭峯) 인선백(印禪伯)을 생각하면서128 63. 굉소선인(宏紹禪人)이 산중을 방문해 준 시에 답함129 64. 운흥장실(雲興丈室)에 드림130 65. 백운암(白雲菴)의 검선객(儉禪客)이 가타(伽陀) 3수를 보내 주었는데, 대개 근일(近日)에 고요한 가운데 얻은 바를 쓴 것으로 읽고 감탄했으므로 차운해서 답함. 4수130 66. 이별할 때 김찰방(金察訪)의 운을 따라 답함132 67. 상국(相國) 농서공(?西公) 존비(尊庇)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한 사람은 숙위(宿衛)에 뽑혀 20세에 조정에 들어갔고 또 한 사람은 조계의 공문(空門: 불교)에 들어가 10세에 승려가 되었다. 상국(相國)은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해 시를 지어 보내 주었다. 나는 삼가 두세 번 읽어 보고 감탄해 본래 운을 따라 시 두 편을 지어 각하(閣下)에게 드림133 68. 산속 봄날137 69. 더위 속에서 사람들에게 보임137 70. 안렴사(按廉使) 반공(潘公)이 산에 이르러 재(齋)를 설치하고자 죽청(竹靑)까지 왔으나 비가 많이 내려 냇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다시 평양(平陽)으로 향했다. 나는 그 소문을 듣고 안쓰럽게 생각해 시를 지어 그에게 부침137 71. 운을 따라 삼장장실(三藏丈室)에 드림138 72. 삼장공(三藏公)이 지팡이를 옮겨 동쪽으로 간다는 소문을 듣고 거친 말로 삼절(三絶)을 지어 드림140 73. 안렴(按廉) 반공(潘公)이 다시 산속을 방문했으므로 산어(山語)를 지어 드림141 74. 날씨 갬을 기뻐함142 75. 삼가 농서상국(?西相國) 존비(尊庇)가 아름다운 시 두 수와 노래 한 수 보내 준 것을 받았다. 하나는 동정군(東征軍)의 위용이 굳셈을 서술했고 또 하나는 군수품의 조달이 어려움을 서술했다. 시를 받들어 못남을 잊고 삼가 원래 운을 따라 억지로 산어(山語)로 지어 각하에게 드려 기분을 돋울까 함이다. 인(引) 풍진세상 길이 막혀 소식 드물고, 각하의 안부 몰라 한심스럽더니, 다행히 긴 강이 있어 두 곳을 통해 즐거이 두 잉어가 새로 편지를 보내 주나니142 76. 즉석에서 시를 지음144 77. 게송(偈頌)을 지어 여러 승려에게 보임145 78. 산어(山語)로 회포를 서술해 단양상국(丹陽相國) 각하에게 드림145 79. 영남 지방의 어려운 모습. 24운. 庚辰년(1280년 :충렬왕 6년) 동정(東征)의 전함을 만들 때 지음147 80. 도통(都統) 홍상국(洪相國) 자번(子藩) 막하(幕下)께 드림149 81. 안집(安集) 권시어(權侍御) 의(宜)에게 보냄150 82. 9월 9일에 꽃을 대하고 느낌이 있어서151 83. 섣달 20일 하루 종일 강풍이 불고 눈이 간간이 휘날렸으므로 문을 닫고 들어앉아 스스로 즐거운 회포를 두 수의 시로 쓰다153 84. 초봄 열선백(悅禪伯)에게 드림154 85. 일본 정벌을 칭송함154 86. 도순문(都巡問) 이자추 행헌(李紫樞行軒)의 방문을 맞으면서 드림. 존비158 87. 보림사(寶林寺) 입공(立公)이 서울 간다는 소식을 듣고 시를 지어 보냄158 88. 병중에 홍상국(洪相國)이 깃발을 돌려 서울로 돌아간다는 것을 듣고 그리움에 북받쳐 억지로 악어(惡語)를 지어 행막(行幕)에 드림159 89. 사자수(師子岫) 공이 석장(錫杖)을 강동 백운암(白雲庵)으로 옮긴다는 것을 듣고 감탄해 지음159 90. 농민을 불쌍히 여겨 흑양(黑羊, 1283년) 4월 1일 빗속에서 지음160 91. 한평양(韓平陽) 사기(謝奇)가 최선사(崔禪師)를 곡(哭)한 운을 따라 답함162 92. 재(齋)가 끝나고 우연히 희어(戱語) 한 편을 지어 인선백(印禪伯)에게 보임162 93. 우연히 씀. 1수166 94. 만연사(萬淵社)의 선로(禪老)에게 두 수의 시를 건네줌166 95. 김시랑 훤의 운을 따라 답함167 96. 선석암(禪石庵)에 우거하면서 대나무를 심어 놓고 봄169 97. 암자 주인이 산을 내려간 후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므로 구를 지어 부침170 98. 참선하는 사이에 시를 지어 동지에게 보여 줌170 99. 가을날에 우연히 씀171 100. 졸다 일어남171 101. 오산(鼇山) 꼭대기에 좌선암(坐禪巖)과 행도석(行道石)이 있는데, 선각(先覺)진각(眞覺) 두 국로(國老)가 편안히 앉아 수도하던 자취다. 근래 사내(社內)의 명승 노공(盧公)이 좌선암 아래에 자리를 정하고 잡목과 잡초를 베어 내고 절을 지어 살았는데, 그 경치가 뛰어남은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름을 회당화상(晦堂和尙)에게 청하니, 화상은 선석(禪石)이라 이름 짓고 게송을 지었다. 노공이 나에게 속초(續貂)를 권함이 간절하므로 사양할 수가 없어서 억지로 무사(蕪辭)를 엮어 법제(法製)를 우러러 받들어 노공의 장실(丈室)에게 드림172 102. 눈 속 추위에 괴로워하는 시를 지어 평양(平陽) 한사기(韓謝奇)에게 줌174 103. 감정을 기록함174 104. 근래 벼슬을 그만둔 시중 하동영(河東令) 하(瑕)가 화전(花?) 한 폭(幅)을 보내면서 산어(山語)를 요구하므로 억지로 4절구를 지어 각하에게 드림175 105. 이사관(李史) 원(源)이 임금을 호종(扈從)하고 조정에 되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서 시를 지어 부침177 106. 이상국(李相國)이 가산(柯山) 섭무실(葉茂實)이 만든 좋은 먹 한 개를 보내 준 데 대해 감사함178 107. 우러러 법제(法製)를 받들어 자인실(慈忍室)에 삼가 드림180 108. 지병마(知兵馬) 상서 김석(金碩)에게 부침. 공은 그때 탐라에서 적(賊)을 치고 있었음181 109. 5월 15일 밤에 동루에 오르니 검은 구름이 전부 걷히고 달빛이 낮과 같았다. 소나무 소리 물소리가 서로 어울려 일어났다. 오랫동안 앉았으나 피곤함도 잊고 생각이 산뜻하고 산중의 즐거움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한평양(韓平陽)과 같이 있었으면 했으나 불가하므로 시로써 기록함182 110. 게(偈)를 지어 선석암(禪石庵) 선로(禪老)에게 보냄183 111. 만연선로(萬淵禪老)의 운을 따라 받들어 답함. 2수184 112. 연곡선사(燕谷禪師)의 운을 따라 답함185 113. 다시 운을 따라 연곡선사(燕谷禪師)에게 답함186 114. 능가산(楞伽山)에 놀다. 전북 부안군 소래사187 115. 김시랑(金侍郞) 훤()의 운을 따라 답함189 116. 한소향(韓小鄕)에게 보낸 3수. 공은 연도(燕都)에 있었음190 117. 아픈 다리를 스스로 희롱함191 118. 아침 설법을 마친 후에 목을 움츠리고 단정히 앉았으나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으므로 이월고한시(二月苦寒詩)를 짓다192 119. 다시 규봉(圭峯) 인공(印公)이 월헌(月軒) 강박사(康博士)에게 준 시의 운을 따라서193 120. 한가로이 살면서194 121. 우연히 씀195 122. 나한율림(羅漢栗林) 항선객(恒禪客)에게 부침195 123. 한사군(韓使君)의 운을 따라 부침196 124. 초봄에 한사군(韓使君)에게 부침197 125. 홍상국(洪相國) 막하(幕下)의 운을 따라 드림. 6수 197 126. 김소경(金小卿) 훤()이 양주수(襄州守)로 좌천(左遷)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절구를 지어 부침199 127. 다시 앞의 운 사용해 김양주(金襄州)가 새로 사업(司業)에 임명되고 부름을 받아 대궐에 다다름을 축하해 부침200 128. 김시랑(金侍郞)의 <송선객(松禪客)을 보냄>이라는 시를 보고 운을 따라 지어 부침201 129. 고양(高陽) 가는 길에 제호조(提壺鳥) 소식을 듣고 짓다. 그 때 금주령(禁酒令)이 있었음201 130. 주상 폐하가 천조(天朝)를 뵙고 특별한 보살핌을 받아 편안히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로 기쁘고 즐거워 거꾸러지고 넘어지면서 삼가 성덕송(盛德頌) 18운을 지어 왕정의 무도회를 당해 하례함202 131. 새 붓을 시험하기 위해 손 가는 대로 한 게송을 써서 시자(侍者)에게 주다205 132. 가을 산205 133. 병중에 심정을 말함206 134. 겨울 자리를 시주한 광림선로(廣林禪老)에게 감사함207 135. 우연히 씀208 136. 원옥상인(圓玉上人)이 산중에 이르러 중국에 간다고 하기에 그 말을 기록해 한 편의 시를 지어 전별함208 137. 우서(偶書)로 여러 선자(禪者)에게 묻다211 138. 어떤 선자(禪者)가 있어 답함211 139. 스스로에게 줌. 동지 후에 씀212 140. 고산대선(孤山大禪)이 방문했으므로 시를 지어 보임212 141. 한거213 142. 만연공(萬淵公)의 시에 답함. 서문을 곁들임213 143. 소(紹) 사제(師弟)의 방문을 사례함. 영소(靈紹)216 144. 영소(靈紹)를 보낸 후 다시 앞의 운을 따라 보냄216 145. 야우송(野牛頌)을 지어 뜻이 같은 사람들에게 보임217 146. 신사(信士) 박공(朴公)이 세운 방광촌(放光村)의 원소난야(圓炤蘭若)를 제(題)함218 147. 한시랑(韓侍郞) 사기(謝奇)에게 시를 부침. 서문을 곁들임219 148. 12월 11일 눈보라 휘날리는데 김승(金昇)을 보내다. 공은 그때 탈상(脫喪)하고 형제와 이별했다220 149. 12월 18일 눈이 조금 내리는 가운데221 150. 새로이 월남(月南) 인공(印公)에게 부침. 공은 규봉사(圭峯寺) 조월암(祖月庵)에서 보월산(寶月山)의 월남사(月南寺)로 출세(出世)했음221 151. 평양(平陽)의 한태수(韓太守) 단(旦)에게 부침222 152. 지원(至元) 21년(1284, 충렬왕 10년) 5월 하순 진변원수(鎭邊元帥) 김상국(金相國)이 주정(周鼎)이 와서 변수(邊戍)를 순찰한다는 소문을 듣고 시 두 수를 지어 바침222 153. 또 김원수(金元帥: 김주정)에게 올리는 시. 서문 곁들임224 154. 원수 상국(相國)이 특별히 속관(屬官)을 보내 방문하지 못한 까닭을 알리기에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해 시를 지어 드림225 155. 우연히 씀226 156. 달밤에 동쪽 망루에 오름227 157. 사람들에게 보임227 158. 달을 읊음. 한 자에서 일곱 자까지228 159. 금장대선사(金藏大禪師)가 새 차를 보내 줌을 감사함230 160. 소사제(紹師弟)의 운을 따라 답함230 161. 흠산(欽山)이 “노승은 평생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고 다만 매일매일 그 모양이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사랑해 게송을 지어 기록한다231 162. 사람들에게 보임232 163. 팔이 짧음을 노래하다 이어(俚語)를 써서 지음233 164. 졸어로 회포를 펴 표형선로(表兄禪老)에게 보임234 165. 수재(睡齋) 홍상공(洪相公)에게 보내는 시. 서문을 곁들임235 166. 이공(李公) 행검(行儉)에게 답함240 167. 남원의 조태수(趙太守)가 방문하면서 시를 주기에 그 운을 따라 사례함. …정혜사에서240 168. 청암(靑巖)에서 계봉으로 돌아가려 하면서 지음242 169. 정을 읊음242 170. 운을 따라 염상국(廉相國) 에게 답함. 승익(承益)에게 2수243 171. 한시랑(韓侍郞)이 내가 조계(曹溪)의 자리를 계승했다는 것을 듣고 시를 지어 하례하므로 운을 따라 답함244 172. 죽당(竹堂) 이중사(李中舍) 에게 답함. 혼混) 2수245 173. 서울 가는 장륙선사(丈六禪師) 진공(璡公)을 전송하면서246 174. 만연(萬淵) 신장로(新長老) 묵공(公)을 전송하면서246 175. 운흥(雲興) 신장로(新長老) 열공(悅公)을 전송하면서 247 176. 계봉장로(鷄峯長老) 우공(友公)에게 답함248 177. 산에 살다 2수249 178. 장난삼아 씀250 179. 조백론(棗栢論)을 설명하던 차에 게송을 지어 동범(同梵) 제덕(諸德)에게 보임251 180. 조백론(棗栢論)의 강(講)을 마치던 날 계봉에서 장구(長句) 4운을 주므로 차운해 답함252 181. 계봉(鷄峯)의 우공(友公)이 절을 떠나 진원(珍原)의 취봉난야(鷲峯蘭若)에 옮겨 살면서 시를 보내 주기에 운을 따라 그에게 답함253 182. 더위의 고통스러움을 읊음 3수254 183. 한가한 가운데 이것저것 읊다 6수256 184. 도안장로(道安長老)에게 부침258 185. 평양(平陽)의 신태수(新太守) 이공(李公)에게 보냄 세기(世祺)259 186. 옛날을 생각해 두 수를 지어 계봉장로(鷄峯長老)에게 보냄260 187. 조계산의 방장 동쪽 담 아래 산다(山茶) 한 그루가 있었다. 무자년(戊子年, 1288) 봄에 오래도록 꽃이 없었으나 4∼5월 사이에 비로소 활짝 피었다. 괴이하게도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 시를 지어 기함261 188. 선국사(先國師)가 원소암(圓炤庵)에 못을 파고 연꽃을 심으면서 지은 시에 받들어 답함262 189. 산에 살다263 190. 가을날 진락대(眞樂臺)에 오름. 진락대는 동쪽 방장(方丈) 뒤에 있음264 191. 원소암(圓炤庵) 벽 위의 옛 시제를 보고 기록함264 192. 자서265 193. 어버이를 뵈러 서울 가는 연숙선자(淵淑禪者)를 보내면서266 194. 원각소(圓覺疏)를 강설(講說)하던 차에 짓다266 195. 새벽에 일어나 새소리를 듣고서 짓다267 196. 신묘년(辛卯年, 1291) 초여름에 난을 피해 불대사(佛臺寺)에 이르러 선국사(先國師)가 남긴 보게(寶偈)를 보고 감격을 참을 수 없어 삼가 재배하고 답함267 197. 밤에 앉아서. 2수268 198. 사군(使君) 윤해(尹諧)가 산중을 방문해 머물도록 했으나 하루도 자지 않고 갔으므로 보낸 뒤 시를 지어 부침269 199. 돌아오기를 재촉하는 말을 진행(眞行)진경(眞?) 두 소사(小師)에게 보냄270 200. 소사(小師) 심선(心璇)이 취봉에서 되돌아오면서 취봉노인이 준 고조시(古調詩) 한 편을 갖고 와 보여주므로 읽고 감탄했다. 병중에도 억지로 그 운을 따라 노인 좌하에게 부침270 201. 취봉선로(鷲峯禪老)가 방문해 시 세 수를 주므로 운을 따라 답함273 202. 한가한 가운데 회포를 읊음274 203. 네 명의 성인을 찬양하다274 204. 가을비 오는 원소탑원(圓炤塔院)에서276 205. 감로장로(甘露長老)에게 답함277 206. 시자(侍者)가 게송을 청하므로 써서 주다277 207. 빗속에 졸다가 일어남278 208. 우연히 읊음278 209. 저무는 봄에 즉사(卽事)279 210. 봄을 아쉬워하며 읊음279 211. 한가한 가운데 우연히 씀280 212. 큰 소나무. 설두사자봉(雪豆師子峯) 시를 본받아서281 213. 일찍이 옛 시를 본떠서 지은 것이 있으므로 다시 기록함281 214. 사람을 경계함. 2수282 215. 내가 평소에 풍악산(楓嶽山)의 뛰어난 경치를 듣고 목을 늘여 동쪽을 바라본 지 오래였다. 근래 사람들과 같이 갈 약속이 있었으나 불행히도 어느 날 저녁 실각해서 발을 다쳐 한 걸음도 걸을 수가 없어서 동쪽으로 놀러 갈 계획이 아득하게 되었다. 이것이 여러 생의 업장이 깊고 죄가 많아서 그렇게 된 것인가? 깊은 회한과 자책이 있어 한 편을 지어 스스로 위로함. 정혜사에서 지음283 216. 상국(相國) 농서공(?西公)이 중국의 중사(中使)와 같이 영남 지방의 동정함(東征艦)을 감독하러 왔다가 밤중에 몸소 산속을 방문했으므로 그 은혜 너무도 감격스러워 악시(惡詩) 한 편을 지어 행막(行幕)에 부침 정혜사에 머물 때 지음285 217. 사자수(師子岫) 공(公)이 조계(曹溪)에서 회강암(檜岡庵)으로 향하던 길에 내가 머물러 있던 곳을 방문하고 2일간 미을장(味乙莊)에 머물러 자면서 게송을 지어 부쳤다. 그 운을 따라 답함 정혜사에서288 218. 우연히 2수를 씀 여섯 글자로 말함289 219. 둔재(鈍才) 김훤(金)에게 희롱으로 답함. 2수 조계에 머물면서 지음289 220. 삼가 보내 준 운을 따라 수재(睡齋) 홍상공(洪相公) 좌우(座右)에 드림290 221. 운을 따라 소경(小卿) 한사기(韓謝奇)가 연도(燕都)에 있으면서 보내 준 시에 답함291 222. 평양(平陽)에 새로 부임한 수(守)가 시랑(侍郞)으로 있으면서부터 정치의 교화를 폈다는 것을 알고 지어 보냄292 223. 다시 앞의 운을 사용해 한국박(韓國博) 에게 보냄 사기(謝奇)292 224. 별동(別洞)에 놀면서 계족봉에 있을 때 지음293 225. 계봉(鷄峯)의 고통 정혜사에 있으면서 희롱으로 지음294 226. 병중에 혼자 앉아 회포를 서술함297 227. 우연히 설당(雪堂)의 운을 써서 인(印)묵() 두 선인에게 보이다 이하 3수는 조계산에 있으면서 지음298 228. 앞의 운을 써서 희우(喜雨)에 답함299 229. 앞의 운을 써서 인선백(印禪伯)에게 답함300 230. 앞의 운을 써서 암자의 즐거움을 씀301 231. 앞의 운을 써서 인선백(印禪伯)에게 답함302 232. 삼현(三賢)을 애도하는 시 서문을 곁들임304 233. 새로 부임한 승선(承宣) 이공(李公)혼(混)을 축하해 부침. 3수 공은 선열(禪悅)에 조예가 깊었음306 234. 산속의 즐거움 처음 출가해 백련암(白蓮庵)에 있을 때 지음307 235. 다보사(多寶寺)에서 읊음 전남 해남(海南) 금강산(金剛山)에 있음309 236. 흥룡사(興龍寺)에서 읊음 전남 나주군 금강진(錦江津) 북쪽에 있음309 237. 최이(崔怡)가 보낸 다향에 감사하며 최이가 순천지주사가 되어 편지와 차와 능엄경을 보냈다. 사자가 돌아가면서 답장을 요청했다. 사(師)는 “나는 이미 속세를 떠났으니 편지 왕복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나 사자가 굳이 권하므로 시를 써서 주었다310 238. 집의 아우 문개(文凱)가 벼슬에 나아감을 축하함 원개(元凱)의 아우 문개가 장원급제 하여 평양(平陽)군수가 되었으므로 원개가 시를 짓다311 239. 금강진(錦江津)에서 읊음312 240. 서울에 이르다312
원감국사 충지는 몽고의 침략, 삼별초의 항쟁, 정동(征東)의 역(役) 등을 겪으며 질곡의 세월을 살았다. 백성들의 참담한 고통을 보면서 마음 아파했던 충지의 작품에는 애민(愛民)과 우국(憂國) 정신이 현현(顯現)되어 있다.
자구마다 깊은 뜻을 내포하고 있고, 속기(俗氣)를 벗어난 경지에 이르렀으며, 문장 또한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상태였다고 했으니 가장 적당한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어릴 적에 유문(儒門)에 깊은 소양을 쌓았고, 불문(佛門)에도 깊은 경지에 다다른 결과라고 추측된다. 즉 유·불의 온축(蘊蓄)이 자아낸 보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원감국사집≫은 한 시대를 고민하다가 사라져 간 충지의 얼이 응고된 영롱한 보석일 터이다.
책속에서
밤낮으로 벌목해 전함 만들다 힘은 다했고, 척지(尺地)도 개간하지 못했으니 백성은 무엇으로 연명하랴 가구마다 묵은 양식 없고 태반은 벌써 굶어서 우노라 하물며 다시 농업을 잃었으니 당연히 다 죽음만 보겠네 슬프다! 나란 무엇 하는 사람인가? 눈물만 공연히 흘러내리네 -<농민을 불쌍히 여겨 1283년 4월 1일 빗속에서 지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