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닝의 작품 중 창작 시기와 작품 경향,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그의 기본적 인식을 보여 준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골랐다. <이리>: 부모를 모두 잃고 삼촌 집에 얹혀살게 된 열 살 남짓의 어린아이를 서술자로 설정하여 어른들 세계의 욕망과 이기적인 잔인함을 투시하고 있다. 삼촌 집에 살고 있는 ‘나’는 숙모의 학대를 받는다. 숙모는 자신의 아이를 갖기 위해 양치기로 고용한 일꾼들과 관계를 가진다. 이야기는 양을 잡아먹는 이리를 잡는 과정을 통해 숙모의 간통이 발견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즉, 실제 양을 해치는 이리와 양같이 순한 아이를 학대하는 숙모의 이리 같은 마음을 없애는 과정이라는 두 가지 축으로 전개되는 매우 치밀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동틀 무렵>: 송대 화본소설인 <착참최녕(錯斬崔寧)>을 근간으로 하여 새롭게 구성한 것으로 고전과 현대의 대화를 시도한 것이면서도 동시에 고전소설과는 다른 인간과 사회·체제에 대한 사고를 보여 주는 수준 높은 작품이다. 이야기의 내용은 보리 다섯 석으로 관아의 말단 포졸 자리를 얻은 ‘나’가 일을 시작한 첫날 목도하게 되는 재판 과정의 불합리다. 인명이 걸린 중대한 사건을 대하는 아편쟁이 나리의 게으르고 무심한 모습, 합리적인 조사보다는 억압적인 폭력과 위협을 통한 심문, 재판을 둘러싼 금전 수수와 관아의 각 계층별 이익 분배 등 모순된 사회제도와 그 속의 인간 탐욕을 폭로한다. <황금 제련사>: 메타픽션을 연상시키는 수법을 채용하여 전통소설의 불문율인 서술의 완결성을 파기하고 완전히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이다.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인물과 사건의 발단이 등장하는 전반부와 각기 다른 세 개의 결말을 제시하는 후반부가 그것이다. 이런 구조로 인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의 <덤불 속(藪の中)>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주시닝은 인물의 관점과 입장에 따라 변하는 결말이 아닌 소설 속 사건 자체의 완전성이 부정되는 완전히 새로운 서술을 시도하여 더욱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서술에 대한 도전을 보여 준다. <지금은 몇 시?>: 소설을 언어의 실험장으로 하여 자유연상과 상상, 의식의 흐름의 대량 도입, 생활의 세부적 묘사를 통해 무의식 세계 속의 신감각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소설의 내용은 한 남녀의 아주 평범한 일상과 부단히 변하는 심리 상태가 전부인데, 일정한 주제의식 아래 인생의 도리나 방향을 제시하는 기존 소설과는 달리 생활의 세부 묘사와 대수롭지 않은 인물들의 의식 흐름 자체가 주는 재미에 치중하고 있다. <장군과 나>: 주시닝이 평생 추구한 인간성의 경지를 보여 준다. 주인공인 ‘해피(Happy) 왕’은 평생 군대에서 복무한 장군으로 해학적이지만 우직하고 소임에 충실하며 무엇보다 부하와 동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중국인의 전통적인 인애(仁愛)사상과 기독교적 박애사상이 잘 조화된 인물이다. 이 소설은 비록 군인의 삶을 소재로 하였지만 반공 이데올로기의 각성보다는 사소한 일상사를 통해 한 개인의 생명에 대한 독실함과 경건함, 인생에 대한 열정과 인간의 영성(靈性)에 관한 믿음을 보여 주고 있다.
책속에서
[P.283~284] **≪이리≫, <장군과 나>
장군은 안경을 벗고 웃었다. “여기에 피카소가 친공산당 경향이 있으므로 추상화도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나는 우리 군인들이 적진에 대해 너무 신경과민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회화계의 친구들도 경각심이 이렇게 큰지 몰랐습니다. 물론 당연히 좋은 현상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알기에 피카소도 우리와 같이 두 눈이 콧대 위에 붙어 있는 화가일 뿐이지요. 결코 추상화를 그리는 화가가 아닙니다. 또 흐루쇼프는 추상화를 ‘자산계급의 몸에 흐르는 고름’이라고 여러 번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흐루쇼프가 이런 연기를 해서 뭘 위장하려고 한 건지도 모르지요. 셋째는 아시다시피 청년들은 자고로 언제나 새로운 것을 좋아하지요. 우리도 젊었을 때 그랬지 않습니까? 얼마 되지 않는 머리칼을 오늘은 왼쪽으로 내일은 오른쪽으로 가르마를 타면서 말입니다. 지금은 다 앞으로 통일하여 내리 빗지 않습니까? 안심하십시오. 올백으로 하든, 가르마를 타든, 어떻게 빗어 보았자 그 머리칼이 그 머리칼이지요. 나이가 들면 다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른 예를 더 들어 보면, 여러 화가 선생들은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법을 아시고 있겠지만, 제 생각으로 여자의 몸은 어디 한군데 안 예쁜 데가 없는데 유독 쭈글쭈글한 정갱이는 보기에 밉지요.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미니스커트, 핫팬츠같이 다들 목숨을 걸고 이 무릎을 내놓으니 아마도 추함을 숨길 줄을 모르는 듯합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좋아하니 그렇게 하게 놔두면 되지요.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안심하고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면 됩니다. 우리는 다들 21세기까지 살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습니까? 21세기는 중국인의 세기이니 우리가 자꾸 말로 제지하기보다는 그들이 행동으로 잘할 수 있도록….”